@gsmini님 녹색의날(미도리노히)은 쇼와일왕 생일(쇼와 일왕 생전에는 생일기념으로 휴일)을 사후에 기념하기 위해서 별도 휴일로 지정한거에요. (자연의 혜택에 감사한데 어쩌고 하면서 녹색의 날로 이름지음) 식수제라고 5월에서 6월쯤에 일요일에 하는게 있는데 이건 그냥 행사고 별도 식목일은 없는거 같더라구요
김낄낄
IP 211.♡.88.174
11-17
2022-11-17 09:47:14
·
이거보면 중국도 하면 대단하긴할거같네요;;
가봐야안다
IP 117.♡.252.194
11-17
2022-11-17 09:49:17
·
@김낄낄님 중국도 산림복원 매가프로잭트를 여러개 진행해오고 있습니다 사막화된 땅에서 생태계 복원에 성공한 케이스도 있어요
그래서 옛날 드라마를 보면 노비가 산에서 나무 모아오는(처음은 죽은 나무, 후에는 닥치는 데로) 장면을 볼 수 있죠.
인구는 늘어가는데 연료로 나무를 사용하니 갈수록 나무는 부족하고, 행정은 무너지니 관에서 관리하던 산의 나무까지 베어지게 됐습니다.
콩지아범
IP 112.♡.38.156
11-17
2022-11-17 10:40:56
·
추가로 돈 될 만하면 나무뿌리까지 뽑아간 왜구들도 있었구요 한국전쟁 당시에 포격으로 벗겨진것도 있고 총체적 난국이였지요...
쳐프
IP 222.♡.105.153
11-17
2022-11-17 13:5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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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nga님 문득 제러드 다이아몬드의 문명붕괴에서의 이야기들이 생각났네요. 자원고갈과 시스템 유지 사이에서 멸망으로 들어선 문명들과 구한말의 우리 상황 사이에 접점이 있어보이네요. 그게 사진으로 찍혀있으니 좀더 와닿는 느낌입니다
게임의발견
IP 110.♡.51.148
11-17
2022-11-17 14: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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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주의자님 나무로 연료 떼고 불태워서 밭 일궈서 화전민 해서 먹고 살던 시절이라 박정희가 석탄주고 집 지어주고 내려오게 했습니다.
발롯
IP 125.♡.214.137
11-17
2022-11-17 14:47:47
·
@평화주의자님 연료를 나무로 사용해서 그런것 맞고요 그때에는 산에 나무를 관리하는 영림소가 있었는데 농민들이 제일 무서워 했던 사람이 바로 영림소 직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로 불법 도벌을 적발하는 일을 했는데 그때 당시는 나무를 연료로 사용하기에 누구하나 안 걸릴 사람이 없었기에 이 직원한테 밉 보이면 벌금 물고 경찰서에 끌려 갔죠 ㅎ
브리티쉬매력남
IP 220.♡.97.159
11-17
2022-11-17 15:12:33
·
@평화주의자님 외삼촌이랑 같이 외가쪽 선산 갔었는데 그때 하시는 말씀이 "삼촌 어렸을 때만해도 이렇게 산에 나무나 바닥에 마른 나뭇잎들이 있지도 않았다. 땔감으로 쓰느라 나무나 마른 잎이 남아나질 않았었다."라고 그러시더군요.
@평화주의자님 요즘 매우 극찬하는 온돌(구들)...의 잘 알려지지 않는 부작용때문이죠. 연료(땔감) 소모량을 극대화시킨 주범이고, 동시에 구들이 보편화되는 시기인 17세기 즈음은 전지구적으로 소빙하기 도래라는 자연현상이 일어났고, 구들 확산은 추워진 기후에 대한 대응이었죠. 그리고 한번 따뜻함을 맞보면 다시 되돌릴 수 없었고요.
kapelle
IP 112.♡.11.179
11-17
2022-11-17 16:36:55
·
@평화주의자님 예전에는 장작이 난방도구였는데 이걸 석탄이 대체하게 되었죠. 미국 제외하고 유럽쪽도 거의 마찬가지였다고 합니다.
길잃은고양이
IP 221.♡.185.192
11-17
2022-11-17 20:53:28
·
@평화주의자님 기본적으로 난방이 아궁이에 불을때는 온돌난방이었기때문. 난방용으로도 조리용으로도 불을때야되는데 나무를 필요로 합니다만
조선전기까지만해도 나무는 울창했으나 저런모습이 된건 조선후기에 이르러서입니다.
1. 온돌난방의 보급이 조선후기인 17세기에 되어서야 보편화됨. 2. 이게 중요한데 조선건국쯤 인구는 5~600만정도, 조선후기 인구는 1800만정도. 인구수증가로 나무 수요도 증가. 3. 조선후기 사회혼란으로 집을 잃고 떠도는 화전민들이 늘어나면서 산에다 불을 질러서 농사를 지어버리는경우가 많이 발생.
RanomA
IP 223.♡.175.131
11-17
2022-11-17 09:47:57
·
산림복구와 함께 화석연료의 사용으로 땔감을 쓸 일이 줄어든 것도 영항이 있겠지요.
일요일마다 산에 나무하러 가시던 부모님과 솔잎 낙엽 갈쿠리로 끌어모아 들고 오던 때가 40년 전이네요. 부산 금정 산성마을이니 어쩔 수없었지요.
야야냐샤
IP 36.♡.145.104
11-17
2022-11-17 14:16:24
·
@RanomA님 그때는 금정산도 민둥산 같았나요?
RanomA
IP 125.♡.92.52
11-17
2022-11-17 18:44:13
·
@야야냐샤님 40년 전 기억이기는 한데 민둥산 같지는 않았어요. 산성 마을 자체가 워낙에 깊은 산 속이라 사람도 별로 없고, 산성 마을에서도 형편 좋은 집 사람들은 연탄 떼고, 안되는 사람들은 나무하러 가는 때였으니까요.
IP 39.♡.59.64
11-17
2022-11-17 09:48:16
·
원래 없었던 건가요 ㄷ ㄷ ㄷ
박스엔
IP 112.♡.230.142
11-17
2022-11-17 09:48:31
·
박정희가 독재권력 활용해서 성공시킨 사업 아니던가요? 독재권력이 이럴 때 효과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 어마어마한 인건비를 으쌰으쌰로 떼워 버릴 수 있으니까요.
@박스엔님 아이러니는 .... 그런 박정희가 정작 군인 시절에는 부하들을 산에 보내서 닥치는대로 나무를 베어서 장작을 대량 만들고 그 것을 팔아서 자신의 자금으로 사용하는데 대한민국 일등 선수였습니다. 만주군 선배들에게 그 돈으로 상납도 하고 자신은 술쳐먹고 부하들 놀러오라고 해서 용돈 쥐어주고.. 이런 식으로 인맥관리를 해서 결국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탈취하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추가. 쓰고나서 다시 보니까 요즘도 이런 테크로 국가를 쳐말아드시는 인간이 한마리 있어요)
큰 사건은 그사람이 강원도 지방에 사단장으로 부임한 후에 늘 하던대로 장병들을 대거 나무하러 보냈는데 하필 폭설이 내려서 수십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합니다. [위키.. 1955년 7월 14일 제5사단 사단장이 되었다.[101] 1955년 겨울 예기치 않은 폭설이 발생, 작업 중이던 여러 사단 소속 장병들이 사고를 당한 사건이 발생한 후 박정희는 문책성 인사 조처로 대기 발령되었다가 1956년 육군대학에 입교하였다.]
이런 부패 장군의 경력과 남로당 군사 총책으로 사형까지 받은 전력이 더해져서 한직을 빙빙 돌다가 전역당할 처지가 되니까 원래는 김종필이 마음에 품었던 군사반란을 자신이 가로채기 해서 일으킨 거에요.
Harmonics
IP 112.♡.166.48
11-17
2022-11-17 15:32:12
·
@HighSpring님 김종필이 군사반란을 맘에 품었다는 건 출처가 있는 건가요? 당시 김종필은 그럴정도 계급이 한참 낮지 않았나요? 그정도 미친 사람은 아닐 걸로 생각하는데요. 그에 반해 박정희는 동료에게 간간히 군사반란 이야기를 했던 걸로 아는데요
슈퍼 멜론
IP 106.♡.14.17
11-17
2022-11-17 16:54:23
·
@Harmonics님 육사 초기 기수들이 별 자리와 장관 자리 다 차지하고 있는데, 불과 몇기수 차이나지 않은,,, 그리고 나이조차도 많이 차이나지 않는데, 계급은 아직도 무궁화,,,, 영관급이었던 장교들(김종필 또래들)의 불만이 5.16. 쿠데타의 주요 요인 중의 하나입니다.
(전두환이 정규 4년제 육사 최초 기수인 11기인가 12기인데, 그 전의 1~10기 정도까지는 그야말로 한끝 차이밖에 안 나는데, 계급 차이는 어마어마하였죠.)
@Harmonics님 실제로 516 쿠데타는 김종필의 작품이며 당일에도 박정희는 은신처 다락방에 숨어서 막걸리 마시다가 김종필 등 혁명주동세력의 작용으로 많은 부대가 참가하는 소식을 들은 후에야 새벽에 나와서 한강을 건넌 사실이 있습니다. 박정희는 젊은 장교들의 바지사장 정도였다가 나중에 실권을 움겨 쥔 경우입니다. 아프리카 일부 국가에서는 대위나 상사 계급으로 쿠데타를 주도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신생 국가애서 계급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시 김종필이 강제예편까지 당했던 이른바 '정군운동' 은 세미 쿠데타 같은 대형 항명사건이었고, 그는 이후에도 계속해서 세력을 규합해서 박정희 까지 끌어들인 케이스 입니다.
[위키 발췌] 항명 파동과 강제 예편 - 5·16 군사 정변 전후의 김종필 그는 군에서 주로 정보관계 업무에 종사하다가 소령을 거쳐 1958년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기획과장으로 부임했다. 기획과장 재직 중 중령으로 진급했는데, 다른 기수보다 소령에서 중령으로 진급하는 것이 8년 정도 늦었던 그의 동기들은 군 운영체계에 불만을 품게 됐다. 어쨌건 그는 육군 중령으로 진급한지 몇달 지나면서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기획과 과장에서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정보처 처장이 되고, 이후 1960년 육군본부 정보국 행정처 처장에 임명되었다.
1960년 8월 24일 김종필과 석정선 중령은 성당에 미사 중이던 장면 국무총리를 찾아가 서면으로 정군을 요구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서면은 전달되지 않았고, 이는 후에 그가 항명파동에 연루되는 계기가 됐다. 장면 내각은 숙군을 단행하려 했고, 이때 그가 석정선과 함께 모든 책임을 지고 예편하는 것으로 파동을 마무리지었다. 예편 이후 별다른 직업이 없던 그는 정계 입문을 결심한다.
1961년 4월 19일 4.19 의거 1주년 기념 시위를 거사일로 정하고 박정희와 함께 군사 정변을 기도했지만 장면정권의 시국정화단에서 학생 시위대를 매수하여 4월 19일 당일은 조용했고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해 5월 다시 거사일을 정한다.1960년에 일어난 항명 파동으로 육군 중령에서 예편했다. 갑자기 일자리를 잃게 된 김종필은 한때 '사상계'를 찾아가 이력서를 넣었으나 면접에서 탈락했다. 그러나 예비역 중령 신분으로 꾸준히 박정희 등과 교류했고, 1961년 5·16 군사 정변을 준비한다. 5·16 군사 정변에 참여했고 5·16 군사 정변이 성공하자 다시 현역으로 복귀, 육군 중령이 됐다. 이어 육군 대령으로 진급했고, 육군 준장으로 진급했다. 한편 박정희가 5·16을 거사했다는 비난을 받게 되자, 그는 "내가 박정희 장군을 모시고 5·16을 기획했다."라고 했다. --------- 기록에 따른 조각 사실들 1. 건국 초기 부터 상당 기간 동안 만주군-일본군 출신들이 군을 주도했고 이승만이 닥치는대로 친일 군인들에게 군대를 맡겼기 때문에 나이와 계급의 괴리가 매우 큰 경우가 많았습니다. 박정희도 계급에 비해서 나이가 매우 많았습니다. 그는 대구사법을 졸업한 후에 20 대 초반을 초등 교사로 재직했고(당시 학교에서 김재규의 담임 교사로 그와 각별한 인연을 맺음) 그 후에 유명한 천황 혈서를 쓰고 뒤늦게 만주 육사에 진학했던 이유와, 해방 직후 신분을 속이고 광복군에 합류하려다가 김구 선생의 비서이자 오리지날 굉복군인 장준하 선생에게 거부당하고 고향에 몰래 와서 숨어지낸 시절이 있었고, 또한 빨갱이 군사 총책으로 비밀 활동하다가 여순사건 직후 체포되어 사형선고 받았다가 백선엽 등 만주군 선배들의 구명으로 겨우 살아나서 군에서 쫒겨났다가 한국전쟁 발발 이후에 긴급 복귀하는 과정이 있고 해서 계급에 비해서 나이가 매우 많았습니다. 김종필 또한 고교 졸업 후에 의대 진학 - 자퇴 - 대전사범 진학후 졸업 - 교사 재직 - 회사도 운영해서 돈을 범 - 서울사대 진학 - 군입대 - 탈영 복귀 후 육사 진학 등등 늦깎이 장교 였습니다. [위키 - 1944년 3월, 전쟁으로 4년으로 학제가 단축되어 있던 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바로 주오대학교 예과에 입학했지만, 아버지의 권유로 곧 자퇴하고 귀국하여 대전사범학교에 입학했고 1945년 3월에 졸업하였다. 졸업 후 보령군의 소학교 교사로 발령받았으나 교편을 잡은 지 2개월 만인 8월 15일 광복을 맞고 아버지가 경성부에 사준 집을 팔아 자동차 회사를 운영하여 재력을 쌓았다. 1946년 경성사범학교 사회교육과에 입학하였다. 같은 해 8월 경성사범학교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으로 통합되어 격상되었다. 그러나 1주일 만에 구타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여 탈영하였다. 이후 친구 집을 전전하던 중 극장에 영화관람을 갔다가 육사 교도대와 만나게 되어 자수하고 기간병으로 재입대하였다가 육사 제8기생으로 입학해 1949년 5월에 소위로 임관했다. 소위 임관과 동시에 육군 정보국에 배치되었다. 그 뒤 주로 참모직을 역임하고 1949년 12월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에 중위로 있었다.[6] 이후 한국 전쟁에 참전했고, 육군 정보국 전투정보과 북한반장에 임명, 갑작스런 남침으로 무너지는 전선을 시찰하고 전세를 정확히 보고했으며, 1계급 특별승진해 육군 대위가 됐다.] 이후 계속.
IP 106.♡.72.158
11-17
2022-11-17 09:4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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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어릴때만 해도 실제로 식목일에 나무 심으러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ㅋㅋ 요즘에 식목일 빨간날 하면 그냥 다들 놀러가기 바쁘겠죠 ㅋㅋ 그러니까 제발 빨간날로!
루다나리에
IP 220.♡.221.4
11-17
2022-11-17 09:5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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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 산불땜시 황폐화되는 요즘 산림인데 다시 빨간날되면 좋겠어요 행사도 많이하고 3월로 바꾸자는 말이 있었긴했죠.
산림 녹화는 성공했으니 이젠 좀 내실있는 녹화를 했으면 하네요. 사람들 오해하는 부분이 산은 새로 자라는 숲(나무)만 CO2저감 효과가 있고 성장이 어느정도 끝나면 식물자체의 호흡등으로 더이상 환경개선 효과가 없어 주기적으로 벌목하고 다시 심어줘야 합니다. 다음번에 심을땐 목재로 쓸수 있거나 동물 부양능력이 있는 품종을 늘렸음 좋겠네요 지금 한국산에 있는 나무는 녹화말곤 거의 의미가 없는 잡목에 가까워서요
@madtiger님 반론도 동일 나무의 나이가 일정연령을 넘어가면 CO2흡수능이 떨어지는 연구는 많고 대신 다른 나무종류의 경우 크고 성장이 빠른 종류(보통 삼나무 종류겠죠)는 지속적으로 흡수능이 증가한다는거 같네요. 이건 지역(나무성장에 유리한 아열대+다습한 지역)이나 나무수종의 차이로 봐야 하지 않을까요?
SpiralWorld
IP 116.♡.88.20
11-17
2022-11-17 15:3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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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결님 산림청 퇴직 직원들이 만든 회사가 이 사업을 대부분 수주 한다는 루머가 있더군요. 한번 수주하면 수십년 관리비 받으면서 관리 한다고 합디다.
@songsy0114님 온수 난방 효율을 구들장 공기 난방으로는 밤새 때야 해서 못 따라오죠. 그 탓에 집마다 장작을 꽉꽉 채웠죠.
FootApple
IP 147.♡.87.109
11-17
2022-11-17 12:4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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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tail님 조선 초기에는 남부지방 같은 경우 거의 쓰지 않았고(일본처럼 마루바닥에 화로 같은걸 썼다고 합니다), 중부지방 이북에는 온돌을 쓰더라도 침대 크기 정도 되는 작은 크기였다고 하더라구요. 그런데 조선 중기 이후 날이 추워지고(소빙하기) 하다보니, 방 전체를 덮는 온돌이 갑작스럽게 남부지방까지 유행이 되었다고 합니다. 돌을 덥히는게 열은 오래 가지만...아무래도 오래 걸리고, 특히 부피가 커지면 더 오래 걸리니 연료가 많이 필요했겠지요. 하나만 이유는 아니겠지만, 온돌의 유행과 일반화는 큰 영향을 주었을 거에요. "방 전체를 덮는 온돌"이 당연해 보이지만, 우리 문화에 들어온지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어요. "고추가루 들어간 빨간 김치" 처럼요.
@cattail님 숙종대 이후 온돌이 보급되니 산에서 낙엽과 솔방울이 자취를 감췄다. 라는 기록이 있었고 당시에는 나무가 넘 많아 산불이 잣아 조정에서도 온돌을 장려했습니다. 조선 중 후기에는 산불 예방의 효과가 있었지만 구 후로 200년만에 조선팔도가 전부 민둥산이 될줄은 몰랐죠.
@커피칼디님 구들장 온돌도 초저녁에 한번 때면 거의 새벽까지 갑니다. 한밤중이나 새벽 쯤에 나이든 어른들 뒷간 갔다 오는 길에 장작 두어개 넣어줘서 살짝 불씨 한번 살려주고, 새벽에 밥지을 때 불 좀 넣어주면 또 뜨끈뜨끈 하다가 낮에는 좀 식지만, 방에다 이불 펴놓으면 저녁때까지 온기는 남아있고요...... 아궁이에 불 계속 때면 뜨거워서 잠 못자요. ...... 밤새 때야하는 온돌이라면 구들 공사를 잘못해서 그렇거나, 너무 오래된 구들인데 보수를 안해서 그렇거나... 집 자체를 날림으로 지어서 외풍이 세서 그렇거나... 그래서 그런거죠. ...... 하긴, 부분난방만 조금 하면서 전체난방은 언감생심, 왠만한 집은 그냥 벌벌 떨면서 겨울났던 시절에 비한다면야, 온돌 보급이 장작 수요를 엄청나게 끌어올렸다는 얘기도 맞는 말이긴 할겁니다만......
IP 61.♡.35.230
11-17
2022-11-17 09:5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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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화들 나무 그리기 귀찮아서가 아니라 보이는 나무가 얼마 없어서 조금 그린거군요??..
쟘스
IP 175.♡.90.247
11-17
2022-11-17 09:5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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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사진은 비록 흑백이지만, 제가 군복무할 때 철책 넘어로 봤던 북한의 산 같아요. 북한 쪽을 처음 보고 아 저게 민둥산이구나 했었습니다.
빵구똥쿠
IP 110.♡.54.179
11-17
2022-11-17 09:5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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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소들이 산으로 올라가서 잡으러 다녔다고 진짜 삼촌이 그러더라구요..
요켠
IP 220.♡.95.20
11-17
2022-11-17 09:5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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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산림녹화는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성공적이었고... 이 배경에는 박정희의 밀어붙이기식 작전이 있었죠. 그리고 거기에 참여한 현신규 박사 및 많은 국민들의 희생도 있었구요.
이런 건 독재정부라 성공할 수 있었던 사례라 봅니다...
카우보이태봉
IP 210.♡.72.154
11-17
2022-11-17 15:30:50
·
+ 이게 감시제도(?)도 좋았다고 하더라고요. 전라도에서 심으면 경상도 공무원이 와서 심은거 확인(?)하고 그런식으로 해서 대충 할수가 없었다고...
포졸작곡가
IP 211.♡.8.143
11-17
2022-11-17 09:57:32
·
이건 박정희의 치적 맞죠~
다른 정책은 까일거리가 있지만 이건 못 까죠~
BARCAS
IP 58.♡.58.74
11-17
2022-11-17 13: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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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졸작곡가님 어린여자끼고 양주마시면서 " 나무심어! "한마디한게 치적축에 속할까요?
푸른삼림은 박정희의 치적이다.. 경제개발은 전두환의 치적이다.. 그렇게 우린 우리스스로를 폄하하지만
그모든건 굶주리고 헐벗으면서도 땀흘리고 피흘린 수많은 사람들의 치적입니다.
비바
IP 1.♡.57.88
11-17
2022-11-17 13:28:17
·
@포졸작곡가님 그러게요. 얻어 걸린건지 몰라도 이건 잘 한거 같은데. 중국도 독재라 하긴하지만 페인트 칠로 떼우는 걸로 봐서는 이건 린정해야 하지 않을지.
오느른
IP 106.♡.234.134
11-17
2022-11-17 16:43:53
·
@포졸작곡가님 운동 따라야...연탄이라는 난방 대체품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최초제보자
IP 223.♡.29.126
11-17
2022-11-17 18:4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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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졸작곡가님 빨아줄걸 빨아줍시다 화석연료가 없었으면 아무리 심어봤자 아직도 민둥산입니다
IruJan
IP 39.♡.46.174
11-17
2022-11-17 10: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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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때 식목일이 되면, 아니 산에 나무가 저렇게 빽빽한데 어디에 또 나무를 심으라는 거야?라고 생각했었습니다ㄷㄷ 근데 식목일 있을만 했군요ㄷㄷ
drydrydry
IP 106.♡.129.95
11-17
2022-11-17 10: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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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산이 조선의 상징이었다니, 놀랍네요..
싸구려레일건
IP 59.♡.0.234
11-17
2022-11-17 10: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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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비용 자체는 월드비전에서 지원했는데, 나무를 베지 않도록 석탄개발에 힘 쓰고 행정감시를 다른 지역사람이 하도록 한건 잘했다 생각합니다.
@곰표범님 방향성을 제시해주는 리더의 중요성이 크긴 하죠. 이를테면 이순신 장군이 여러 해잔에서 승리하고 왜군을 격파 했다고 하지, 실제 싸운건 조선 수군들인데 조선수군이 왜란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하지 않잖아요.
광개토대왕이 영토를 넓혔다,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했다, 알렉산더가 페르시아를 정벌했다, 히틀러가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폴란드를 침공했다.. 등등 다 같은 맥락이죠.
최초제보자
IP 223.♡.29.126
11-17
2022-11-17 18:5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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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님 우리가 왕정 국가도 아니고 민주주의 국가에서 모든게 대통령 뜻대로만 되는게 아닙니다 바꾸네때도 지금도 나라 안망하고 어찌저찌 굴러는 가고 있는거처럼요. (지금은 빨리 안끌어내면 정말 망할거 같기는 하네요.) 명령에 죽고사는 전쟁터의 장군이랑 대통령을 동일선상에 놓으시길래 한마디 남기고 갑니다. 경제성장도 그렇고 그당시에 피땀 흘린 국민들의 노고는 잊고 박정희 치적 운운하는게 안타깝네요.
저 때 공무원들 감사를 서로 지역을 바꿔서 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충청도 공무원을 경상도로 보내고 경상도 공무원을 경기도로 보내고, 전라도 공무원을 강원도로 보내는 식으로요. 자기 지역에서 100그루 심은걸 150그루 심었다 이렇게 장부 조작을 못하고, 제대로 된 산림녹화작업이 됐다고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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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다나리에
IP 220.♡.221.4
11-17
2022-11-17 18:2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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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건.님 형동생하는분들이 많아서 늘 카르텔 이슈나오죠 피서지 양아치들이나 섬지방 범죄들 눈감아주거나
vmusoov
IP 125.♡.245.139
11-17
2022-11-17 12:3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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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세 가난한 충청도 산골 출신입니다.
예전 시골의 지금은 겨울 지낼 나무하러 정신없던 시절입니다
유시민의 말처럼 여러 이유가 복합이겠지만
석유곤로. 연탄보일러, 기름보일러의 보급이 가장 큰 이유라 생각합니다, ( 내 생각에는 90프로 이상 절대적)
한 가정이 쇠죽 끓이고, 밥하고, 국하고 방에 불 지피는 나무의 양은 어마어마하죠
삭제 되었습니다.
Galvanic
IP 112.♡.110.106
11-17
2022-11-17 12:4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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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10년 전 개성공단에 한 번 가보았는데.. 경계선 넘자마자 붉은 민둥산이 많이 보여서 이렇게 다르구나 느꼈습니다.
북한도 김정일 김정은이 계속해서 산림녹화 강조하지만 잘 되지 않는 것은 연료가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독재체제의 일사분란함도 기능을 했겠지만, 그 논리대로라면 잘못하면 목숨이 날아가는 북한에서는 왜 산림녹화가 되지 않을까요? 저도 많은 분들이 지적하는 대로 연료공급이 큰 기능을 했다고 봅니다. 산업화가 되어 외화를 얻을수 있었기 때문에 석유와 가스를 사올수도 있었고, 우리나라는 어렵게나마 캘 수 있는 무연탄이 있었다는 부분이 크죠. 그걸로 연탄을 만들어서 난방과 취사를 대체할 수 있었죠. 우리의 푸른 숲은 어쩌면 당시 광부분들의 피와 땀의 유산이라고 할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식량을 외국에서 사올 수 있었다는 부분도 큰 것 같습니다. 사실 연료도 문제지만 화전도 문제였는데, 이는 식량이 부족했기 때문이죠. 화전이 없어진건 다른 역사적인 이유(일명 이승복 어린이...관련)가 있지만, 아무튼 화전을 하던 사람은 농촌으로, 그리고 도시로 나갔던 것도 산림이 많아진 이유라 볼 수 있습니다....부족한 식량생산은 수입을 통해 해결했지요. 결국 우리는 식량자급률이 낮은 나라가 되긴 했습니다만...
다만...너무 속도전으로 만든 푸른 숲이라, 앞으로 잘 가꾸어 나가야 하는 과제가 큰 것 같습니다. 불에 잘타는 소나무 위주로 심은데다가 너무 건드리지 않아서, 겨울만 되면 불쏘시개나 땔감이 되어버리는 숲이 너무 많구요...최근에 "탄소중립"의 이유로 오래된 나무를 베어내고 새 나무를 심는다고 산림청이 간벌을 너무 심하게 해서 욕먹고 있는데, 우리나라 숲의 탄소흡수 능력이 떨어지는 것 자체는 맞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뭐라도 해야 하는건 사실인데 정답이라고 할게 별로 없다는게 문제네요...
제가 소시적에는 이맘때쯤 수확이 끝나고나면 산에 땔감 구하러갔습니다. 물론 녹화 해놓은 나무를 함부로자를 수는없고 낙옆과 솔방울 그리고 소나무 잎사귀를 부지런히 모아서 집에 모으는게 일이였습니다.
그래서 산에 가면 뭔가 청소해놓은듯 갈쿠(갈퀴)자국이 자기산이 있는분들은과 지인들은 그곳에서나머지는 국가소유산으로 가야죠뭐. 해질때쯤이면 지게와 경운기 리어커 그리고 굴뚝의 연기 전기도 동시에들어왔다 나가서 상하기 쉬운 고기라도 행사 있어 사놓은 집은 주위집 귀가하면서 굴뚝을 보고 아이를보내서 아직 밥안차렸으면 조금있다와서 식사하시라고 했던 풍경들이 희미하게 생각납니다.
하긴 조부께서 호박잎과 회관에서 꽁초 주워까서 말려서 섞어 연초 만드셨는데 가끔 옛을 회상하시는듯하면서 일제때나 사변때 이야기 춥고 배고프고.. 그때는 하루 한끼니 쌀밥에 뜨신 국물이면 세상 싸울일 없을것 같았는데 종종 밤에 울리는다툼하는 소리 부부쌈하는 소리 너무 길어진다 싶으면 곰방대끼고 나가보시던
풍족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주린 기억은 없고 다만 그때 특정 느낌은 가끔 그리울때가 있습니다.
@잔치는끝났다님 저는 우도 좌도 아니라는 것을 밝히며.. 원래 대통령이란 자리가 그런거 아닌가요? 누군들 그 자리에 있었다면 당연히 해야할일이 아닌가요? 라고 할 것이 아니라 (실제로 안했을 수도 있고) 그런일을 했던 못했던 보통 대통령이 다 욕도 먹고 칭찬도 듣고 했던거 같은데 말입니다. 잘한건 잘한거고 못한건 욕하면 되는게 아닐까 싶네요
어제 오늘 뜬금없는 독재찬양 목적의 정성들인 글들이 여러까페들에 퍼트려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시리즈 중에 일환인 것 같습니다.
박정희가 한 일이 다 잘못한 것일까? 그건 아니겠죠. 박정희가 16년간 집권했습니다. 16년간 잘못된 결과만으로 초래하는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어느 분이 언급하셨지만, 산업화 시기 목재연료에서 화석연료(연탄,기름)로 전환된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을 겁니다. 기적이라고 말하고 싶을 겁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한대기후, 사막 기후 지역 제외하고, 현대의 온대 기후대의 나라 중 민둥산만 있는 나라가 몇이나 있는지...? 북한을 제외하고요. 심지어 중국도 화석연료 대체되고, 중국 여행 가보시면 나무로 채워진 화려한 녹음의 산이 대부분입니다.
이걸 다르다라고 이야기할려면, 북한 비교가 유일할텐데... 겨우 북한보다 낫다는 이야기 꺼내려고 이런 정성 컨텐츠가 작성된 거는 아니길 기원해봅니다.
내용에는 온갖 불가능이다 불가능이었다 말하지만, 결과적으로 저게 저렇지않은 나라가 드문 상황에서 우리나라만의 기적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그거야말로 일부의 분들이 지속 난리치시던 소위 국뽕 수준이 아닐까요? 그러고보니, 이런 글에 국뽕 타령하러 오시던 분들이 아무도없네요. 아..그 분들은 문통 시절에만 그 타령을 하시긴 했었지요
그나저나 근래 여러 사이트에서 독재자 찬양 컨텐츠들이 배포되는데... 그 의도가 심히 우려스럽네요.
국민들의 지지를 잃은 현 정부의, 향후 공안,협박 독재 정치를 위한 밑밥 깔기가 아니길 기원해 봅니다.
루다나리에
IP 220.♡.221.4
11-17
2022-11-17 18: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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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명읍슴님 저는 딱히 누굴 과하게 칭찬하려는것보다는 우리나라 민족들이 진짜 중간없이 할건 다하는 대단한 그런게 느껴지더군여.이상한사이트에서 퍼온건 아니구용
삭제 되었습니다.
ddungddi
IP 117.♡.2.72
11-17
2022-11-17 13:4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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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림녹화 사업이나 그린벨트가 박정희가 한 일중 진보 보수를 떠나 이견이 적은 치적이긴 하지만 그에따른 어두운면도 분명히 있었죠. 강제로 나무 난방을 금지하고 석탄난방을 시키긴 했는데 가난한시절 아무렇게나 지은 구들장 바닥에서 일산화 탄소가가 새어나와 해마다 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저만해도 3번이나 가스 중독으로 죽을 고비를 넘겨서 마지막 중독 사건 이후 부모님들은 더이상 온돌 난방을 하지 않고 사셨습니다. 겨울엔 바닥에 두툼하게 카페트를 깔고 양말을 두껍게 신고 지냈죠. 급수식 온돌 보일러가 도입된지 오랜 지금도 겨울엔 아주 약하게 난방하시면서 지금도 실내화 신고 생활하시네요.
낮달.
IP 118.♡.6.50
11-17
2022-11-17 13:4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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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몰랐네요. 조선시대? 그림 보면 산이 참 푸르르게 그려져서 계속 그런줄만 알았어요
namuya
IP 112.♡.224.165
11-17
2022-11-17 14: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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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근목피로 살던 세월도 많고 바닷가는 새우껍질채로 먹어 탈나는 게 다반사고 60년대만 해도 장날에 장작 팔러 다녔으니 참 지난 백년은 굽이굽이네요. 아 녹화사업하면 유시민이죠. 녹화 완료된 자라고 ㅋㅋㅋ
달콤한딸기쨈
IP 115.♡.195.188
11-17
2022-11-17 14: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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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자산어보를 보면 밭에 소나무가 있으면 세금을 메겨서 그걸 몰래 캐서 죽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없는 살림에 땅에 나무가 있다고 세금을 메기니 누가 나무를 심었겠습니까?
mohae
IP 223.♡.33.157
11-17
2022-11-17 14: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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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림녹화 사업을 하더라도 임도를 제대로 내놓고 했다면 좋았을껄 하는 아쉬움은 있습니다만 잘한건 맞습니다.
박트린
IP 202.♡.209.8
11-17
2022-11-17 14: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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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화사업때 좀 쓸만한 곧은 나무로 경제성이 있는 나무를 심지 않았다고 한탄하던 교수님 생각이 나네요. 땔깜 말고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나무였다고 하던데 백년대계를 보고 수종을 골랐으면 좋았을텐데요 ㅠㅠ
aperire
IP 202.♡.191.101
11-17
2022-11-17 14: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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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산림녹화는 공무원을 어떻게하면 일 시킬수 있는지에 대한 교본이죠
창밖에기차가지나가요
IP 112.♡.126.228
11-17
2022-11-17 14:3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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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푸르게 된 건 맞는데, 조림 할 때 심은 나무들이 빨리 자라기만 하지 목재로서는 거의 가치가 없는 것들로 심어져서 경제적 효과는 별로 없는 점이 문제죠. 이왕 하는 것 좀 더 길게 내다 보고 좋은 나무를 많이 심었더라면 더 좋아질 수도 있었을텐데요.
어른들이 이시기를 겪고 박정희가 최고요. 박정희 다 하더라고요. 그놈이 나무를 심어서 녹지가 되고 나라 발전에 기여했다고. 특히 대구가 그 박정희부심이 새마을운동이나 저런 정화 활동에 대한 향수가 많은 것 같습니다.
ㄴ묨묭욤용
IP 203.♡.48.136
11-17
2022-11-17 15:3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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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한알님 공감합니다. 저희 고모님은 순도 100% 민주당인데, 박그네 나왔을 때 박정희 얘기를 들으니까 아닌 걸 알면서도 엄청 마음이 심란했다고 하더라구요. 저희 고모님이 이 정도였는데, 2찍 노인들은 절대 벗어나지 못할 거에요.
히쿠
IP 1.♡.193.114
11-17
2022-11-17 14:5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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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는 어디에서 어떻게 살았을지 궁금해지네요
아라미스
IP 115.♡.155.170
11-17
2022-11-17 14:5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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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렷을때 진짜 식목일에 나무심으러 많이 갔었죠 그거 방송에서 뉴스로도 많이 나오고..
노란공
IP 121.♡.13.9
11-17
2022-11-17 15: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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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딩 때 불렀던 메아리 노래에서 '벌거벗은 붉은 산에~' 의미를 알겠네요.
친일매국노 척살
IP 175.♡.20.1
11-17
2022-11-17 15:3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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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까지 시골의 주요 난방원이 나무밖에 없었으니까유. 조선시대내 말할것도 없이 나무만 땟으니 난방과 취사에
규드롱
IP 211.♡.64.135
11-17
2022-11-17 15:3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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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콘텐츠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인물이나 사건을 평가할때 밝은 쪽과 어두운 쪽 골고루 보여주고 평가는 자신 스스로 해야지 편향된 지식만 주입시키면 균형잡힌 사고능력이 마비된 좀비가 되는 거죠.
민토수다삼
IP 222.♡.55.54
11-17
2022-11-17 15:4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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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위도상, 나무가 잘 자랄 위치죠. 당연합니다.
문제는 조선 중후기 부터 온돌이 전국 보급되면서 땔깜으로 마구 써서 남아나지 않은 겁니다. 그러니, 연탄이 보급되고, 나무를 보호하고, 매년 나무 심고 연료를 수입하니까 국내에 나무가 빽빽해진게 당연한겁니다. 이땅의 위치가 원래 그런 곳입니다. 그 전 200년 동안 그꼴 못보고 박박 긁어 땔깜 쓴겁니다.
박정희가 잘한건 맞죠. 그런데 세계 유일..어쩌고 하지만. 세계 유일 성공한 산림녹화산업으로, 비교되는게 사막지방이에요, 아랍지역, 이스라엘 같은 곳들인거죠.
거기는 원래 나무 못키워요. 그러니 사막인데. 거기는 못한거 우리는 한거다 할수가 없는 겁니다.
동일한 위도에 다 나무 많아요. 그런데 거기는 온돌이 없으니, 우리랑 상황이 달랐던거구요.
다만, 가끔 감동하긴 합니다.
제가 어릴때 80년대 90년대.. 모습하고 요즘 모습은 정말 다릅니다.
정말 아름답다고 느껴요..
80-90년대는.. 여름에도 조금씩 조금씩 땅이 보였어요.
90년대 저 군대있을때, 능선을 보라고 배웠습니다. 거기 보면 사람 움직이는게 보인다고...나무가 있어도 지금처럼 자란게 아니었어서 빈곳이 많았죠.
그랬던게 30년을 더 자라고 더 심었죠.
지금은?? 개뿔 산에 있음 겨울 아님 아무것도 안보입니다.
민토수다삼
IP 222.♡.55.54
11-17
2022-11-17 15:4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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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까운게. 진보 진영에서는 박정희 공도 과도 봐줄라 하죠.
그런데 보수는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그냥 다 빨갱이고 죽여야 할 놈들이라고 하죠. 근거는 없지만 내가 싫으니 빨갱이니까 죽이자..네요.
녹색의날을 오해한 거 아닐까요...
식수제라고 5월에서 6월쯤에 일요일에 하는게 있는데 이건 그냥 행사고 별도 식목일은 없는거 같더라구요
사막화된 땅에서 생태계 복원에 성공한 케이스도 있어요
녹화사업을 제대로 해석해서 페인트를 칠했죠.
그래서 옛날 드라마를 보면 노비가 산에서 나무 모아오는(처음은 죽은 나무, 후에는 닥치는 데로) 장면을 볼 수 있죠.
인구는 늘어가는데 연료로 나무를 사용하니 갈수록 나무는 부족하고, 행정은 무너지니 관에서 관리하던 산의 나무까지 베어지게 됐습니다.
한국전쟁 당시에 포격으로 벗겨진것도 있고 총체적 난국이였지요...
나무로 연료 떼고 불태워서 밭 일궈서 화전민 해서 먹고 살던 시절이라 박정희가 석탄주고 집 지어주고 내려오게 했습니다.
연료(땔감) 소모량을 극대화시킨 주범이고, 동시에 구들이 보편화되는 시기인 17세기 즈음은 전지구적으로 소빙하기 도래라는 자연현상이 일어났고, 구들 확산은 추워진 기후에 대한 대응이었죠.
그리고 한번 따뜻함을 맞보면 다시 되돌릴 수 없었고요.
기본적으로 난방이 아궁이에 불을때는 온돌난방이었기때문.
난방용으로도 조리용으로도 불을때야되는데 나무를 필요로 합니다만
조선전기까지만해도 나무는 울창했으나 저런모습이 된건 조선후기에 이르러서입니다.
1. 온돌난방의 보급이 조선후기인 17세기에 되어서야 보편화됨.
2. 이게 중요한데 조선건국쯤 인구는 5~600만정도, 조선후기 인구는 1800만정도.
인구수증가로 나무 수요도 증가.
3. 조선후기 사회혼란으로 집을 잃고 떠도는 화전민들이 늘어나면서 산에다 불을 질러서 농사를 지어버리는경우가 많이 발생.
일요일마다 산에 나무하러 가시던 부모님과 솔잎 낙엽 갈쿠리로 끌어모아 들고 오던 때가 40년 전이네요. 부산 금정 산성마을이니 어쩔 수없었지요.
저 어마어마한 인건비를 으쌰으쌰로 떼워 버릴 수 있으니까요.
아이러니는 .... 그런 박정희가 정작 군인 시절에는 부하들을 산에 보내서 닥치는대로 나무를 베어서 장작을 대량 만들고 그 것을 팔아서 자신의 자금으로 사용하는데 대한민국 일등 선수였습니다. 만주군 선배들에게 그 돈으로 상납도 하고 자신은 술쳐먹고 부하들 놀러오라고 해서 용돈 쥐어주고.. 이런 식으로 인맥관리를 해서 결국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탈취하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추가. 쓰고나서 다시 보니까 요즘도 이런 테크로 국가를 쳐말아드시는 인간이 한마리 있어요)
큰 사건은 그사람이 강원도 지방에 사단장으로 부임한 후에 늘 하던대로 장병들을 대거 나무하러 보냈는데 하필 폭설이 내려서 수십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합니다. [위키.. 1955년 7월 14일 제5사단 사단장이 되었다.[101] 1955년 겨울 예기치 않은 폭설이 발생, 작업 중이던 여러 사단 소속 장병들이 사고를 당한 사건이 발생한 후 박정희는 문책성 인사 조처로 대기 발령되었다가 1956년 육군대학에 입교하였다.]
이런 부패 장군의 경력과 남로당 군사 총책으로 사형까지 받은 전력이 더해져서 한직을 빙빙 돌다가 전역당할 처지가 되니까 원래는 김종필이 마음에 품었던 군사반란을 자신이 가로채기 해서 일으킨 거에요.
불과 몇기수 차이나지 않은,,, 그리고 나이조차도 많이 차이나지 않는데, 계급은 아직도 무궁화,,,, 영관급이었던 장교들(김종필 또래들)의 불만이 5.16. 쿠데타의 주요 요인 중의 하나입니다.
(전두환이 정규 4년제 육사 최초 기수인 11기인가 12기인데, 그 전의 1~10기 정도까지는 그야말로 한끝 차이밖에 안 나는데, 계급 차이는 어마어마하였죠.)
[위키 발췌] 항명 파동과 강제 예편 - 5·16 군사 정변 전후의 김종필
그는 군에서 주로 정보관계 업무에 종사하다가 소령을 거쳐 1958년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기획과장으로 부임했다. 기획과장 재직 중 중령으로 진급했는데, 다른 기수보다 소령에서 중령으로 진급하는 것이 8년 정도 늦었던 그의 동기들은 군 운영체계에 불만을 품게 됐다. 어쨌건 그는 육군 중령으로 진급한지 몇달 지나면서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기획과 과장에서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정보처 처장이 되고, 이후 1960년 육군본부 정보국 행정처 처장에 임명되었다.
1960년 8월 24일 김종필과 석정선 중령은 성당에 미사 중이던 장면 국무총리를 찾아가 서면으로 정군을 요구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서면은 전달되지 않았고, 이는 후에 그가 항명파동에 연루되는 계기가 됐다. 장면 내각은 숙군을 단행하려 했고, 이때 그가 석정선과 함께 모든 책임을 지고 예편하는 것으로 파동을 마무리지었다. 예편 이후 별다른 직업이 없던 그는 정계 입문을 결심한다.
1961년 4월 19일 4.19 의거 1주년 기념 시위를 거사일로 정하고 박정희와 함께 군사 정변을 기도했지만 장면정권의 시국정화단에서 학생 시위대를 매수하여 4월 19일 당일은 조용했고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해 5월 다시 거사일을 정한다.1960년에 일어난 항명 파동으로 육군 중령에서 예편했다. 갑자기 일자리를 잃게 된 김종필은 한때 '사상계'를 찾아가 이력서를 넣었으나 면접에서 탈락했다. 그러나 예비역 중령 신분으로 꾸준히 박정희 등과 교류했고, 1961년 5·16 군사 정변을 준비한다. 5·16 군사 정변에 참여했고 5·16 군사 정변이 성공하자 다시 현역으로 복귀, 육군 중령이 됐다. 이어 육군 대령으로 진급했고, 육군 준장으로 진급했다. 한편 박정희가 5·16을 거사했다는 비난을 받게 되자, 그는 "내가 박정희 장군을 모시고 5·16을 기획했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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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에 따른 조각 사실들
1. 건국 초기 부터 상당 기간 동안 만주군-일본군 출신들이 군을 주도했고 이승만이 닥치는대로 친일 군인들에게 군대를 맡겼기 때문에 나이와 계급의 괴리가 매우 큰 경우가 많았습니다. 박정희도 계급에 비해서 나이가 매우 많았습니다. 그는 대구사법을 졸업한 후에 20 대 초반을 초등 교사로 재직했고(당시 학교에서 김재규의 담임 교사로 그와 각별한 인연을 맺음) 그 후에 유명한 천황 혈서를 쓰고 뒤늦게 만주 육사에 진학했던 이유와, 해방 직후 신분을 속이고 광복군에 합류하려다가 김구 선생의 비서이자 오리지날 굉복군인 장준하 선생에게 거부당하고 고향에 몰래 와서 숨어지낸 시절이 있었고, 또한 빨갱이 군사 총책으로 비밀 활동하다가 여순사건 직후 체포되어 사형선고 받았다가 백선엽 등 만주군 선배들의 구명으로 겨우 살아나서 군에서 쫒겨났다가 한국전쟁 발발 이후에 긴급 복귀하는 과정이 있고 해서 계급에 비해서 나이가 매우 많았습니다. 김종필 또한 고교 졸업 후에 의대 진학 - 자퇴 - 대전사범 진학후 졸업 - 교사 재직 - 회사도 운영해서 돈을 범 - 서울사대 진학 - 군입대 - 탈영 복귀 후 육사 진학 등등 늦깎이 장교 였습니다.
[위키 - 1944년 3월, 전쟁으로 4년으로 학제가 단축되어 있던 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바로 주오대학교 예과에 입학했지만, 아버지의 권유로 곧 자퇴하고 귀국하여 대전사범학교에 입학했고 1945년 3월에 졸업하였다. 졸업 후 보령군의 소학교 교사로 발령받았으나 교편을 잡은 지 2개월 만인 8월 15일 광복을 맞고 아버지가 경성부에 사준 집을 팔아 자동차 회사를 운영하여 재력을 쌓았다. 1946년 경성사범학교 사회교육과에 입학하였다. 같은 해 8월 경성사범학교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으로 통합되어 격상되었다. 그러나 1주일 만에 구타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여 탈영하였다. 이후 친구 집을 전전하던 중 극장에 영화관람을 갔다가 육사 교도대와 만나게 되어 자수하고 기간병으로 재입대하였다가 육사 제8기생으로 입학해 1949년 5월에 소위로 임관했다. 소위 임관과 동시에 육군 정보국에 배치되었다. 그 뒤 주로 참모직을 역임하고 1949년 12월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에 중위로 있었다.[6] 이후 한국 전쟁에 참전했고, 육군 정보국 전투정보과 북한반장에 임명, 갑작스런 남침으로 무너지는 전선을 시찰하고 전세를 정확히 보고했으며, 1계급 특별승진해 육군 대위가 됐다.] 이후 계속.
요즘에 식목일 빨간날 하면 그냥 다들 놀러가기 바쁘겠죠 ㅋㅋ 그러니까 제발 빨간날로!
3월로 바꾸자는 말이 있었긴했죠.
나이든나무가 탄소흡수량이 작다는 주장은 아직 모른다가 정답입니다.
산림청 퇴직 직원들이 만든 회사가 이 사업을 대부분 수주 한다는 루머가 있더군요.
한번 수주하면 수십년 관리비 받으면서 관리 한다고 합디다.
나무해다가 팔고 그러던 시절이죠.
그리고 성곽 근처의 나무들은 모두 베어내죠.
박정희시절 녹화사업이라는 것도
나무를 열심히 심어서 성공했다기 보다
난방과 취사 연료가 연탄과 석유로 대체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죠.
옛날에 나무 못하게 한다고 단속하러 다니고 했는데 단속한다고 밥하고 난방하고 해야하는데 안할 수 없죠.
단속이 심해서 밤에 나무하러 갔다가 불빛 보이면 숨고는 했었죠.
온돌은 나무를 엄청 많이 떼는게 가능하죠
이미 조선시대때부터 온돌로 인해 산림이 황폐화된다는걸 알고 있었지만 못 막은거죠
https://ko.wikipedia.org/wiki/%EA%B0%95_(%EB%82%9C%EB%B0%A9)
구들장 온돌도 초저녁에 한번 때면 거의 새벽까지 갑니다.
한밤중이나 새벽 쯤에 나이든 어른들 뒷간 갔다 오는 길에 장작 두어개 넣어줘서 살짝 불씨 한번 살려주고,
새벽에 밥지을 때 불 좀 넣어주면 또 뜨끈뜨끈 하다가
낮에는 좀 식지만, 방에다 이불 펴놓으면 저녁때까지 온기는 남아있고요......
아궁이에 불 계속 때면 뜨거워서 잠 못자요.
......
밤새 때야하는 온돌이라면 구들 공사를 잘못해서 그렇거나, 너무 오래된 구들인데 보수를 안해서 그렇거나...
집 자체를 날림으로 지어서 외풍이 세서 그렇거나... 그래서 그런거죠.
......
하긴,
부분난방만 조금 하면서 전체난방은 언감생심, 왠만한 집은 그냥 벌벌 떨면서 겨울났던 시절에 비한다면야,
온돌 보급이 장작 수요를 엄청나게 끌어올렸다는 얘기도 맞는 말이긴 할겁니다만......
이 배경에는 박정희의 밀어붙이기식 작전이 있었죠.
그리고 거기에 참여한 현신규 박사 및 많은 국민들의 희생도 있었구요.
이런 건 독재정부라 성공할 수 있었던 사례라 봅니다...
다른 정책은 까일거리가 있지만
이건 못 까죠~
푸른삼림은 박정희의 치적이다..
경제개발은 전두환의 치적이다..
그렇게 우린 우리스스로를 폄하하지만
그모든건 굶주리고 헐벗으면서도 땀흘리고 피흘린 수많은 사람들의 치적입니다.
화석연료가 없었으면 아무리 심어봤자 아직도 민둥산입니다
근데 식목일 있을만 했군요ㄷㄷ
나무를 베지 않도록 석탄개발에 힘 쓰고 행정감시를 다른 지역사람이 하도록 한건 잘했다 생각합니다.
산에 나무가 없던간 땔감 때문이 맞습니다
모든 산이 헐벗은건 어니고요
딸아이에게 아빠 어렸을때 이야기 들려주면 아빠는 조선시대 사람인 줄 아네요...
그렇다고 해도 박정희의 치적이라니, 식목일을 재정한건 맞지만, 굳이 박정희를 들먹일 필요가 있나요? 누구 하나 식목일에 나무안심어 본 사람 있습니까? 우리 모두 해낸일을 왜 한사람에게 몰아주나요
방향성을 제시해주는 리더의 중요성이 크긴 하죠.
이를테면 이순신 장군이 여러 해잔에서 승리하고 왜군을 격파 했다고 하지, 실제 싸운건 조선 수군들인데
조선수군이 왜란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하지 않잖아요.
광개토대왕이 영토를 넓혔다,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했다, 알렉산더가 페르시아를 정벌했다,
히틀러가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폴란드를 침공했다.. 등등 다 같은 맥락이죠.
민주주의 국가에서 모든게 대통령 뜻대로만 되는게 아닙니다
바꾸네때도 지금도 나라 안망하고 어찌저찌 굴러는 가고 있는거처럼요. (지금은 빨리 안끌어내면 정말 망할거 같기는 하네요.)
명령에 죽고사는 전쟁터의 장군이랑 대통령을 동일선상에 놓으시길래 한마디 남기고 갑니다.
경제성장도 그렇고 그당시에 피땀 흘린 국민들의 노고는 잊고 박정희 치적 운운하는게 안타깝네요.
조선 중후기부터 전국에 온돌이 보급됐으니까요.
충청도 공무원을 경상도로 보내고 경상도 공무원을 경기도로 보내고, 전라도 공무원을 강원도로 보내는 식으로요.
자기 지역에서 100그루 심은걸 150그루 심었다 이렇게 장부 조작을 못하고, 제대로 된 산림녹화작업이 됐다고 들었습니다.
가난한 충청도 산골 출신입니다.
예전 시골의
지금은 겨울 지낼 나무하러 정신없던 시절입니다
유시민의 말처럼
여러 이유가 복합이겠지만
석유곤로. 연탄보일러, 기름보일러의 보급이
가장 큰 이유라 생각합니다, ( 내 생각에는 90프로 이상 절대적)
한 가정이
쇠죽 끓이고, 밥하고, 국하고
방에 불 지피는 나무의 양은 어마어마하죠
물론, 독재체제의 일사분란함도 기능을 했겠지만, 그 논리대로라면 잘못하면 목숨이 날아가는 북한에서는 왜 산림녹화가 되지 않을까요?
저도 많은 분들이 지적하는 대로 연료공급이 큰 기능을 했다고 봅니다. 산업화가 되어 외화를 얻을수 있었기 때문에 석유와 가스를 사올수도 있었고, 우리나라는 어렵게나마 캘 수 있는 무연탄이 있었다는 부분이 크죠. 그걸로 연탄을 만들어서 난방과 취사를 대체할 수 있었죠. 우리의 푸른 숲은 어쩌면 당시 광부분들의 피와 땀의 유산이라고 할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식량을 외국에서 사올 수 있었다는 부분도 큰 것 같습니다. 사실 연료도 문제지만 화전도 문제였는데, 이는 식량이 부족했기 때문이죠. 화전이 없어진건 다른 역사적인 이유(일명 이승복 어린이...관련)가 있지만, 아무튼 화전을 하던 사람은 농촌으로, 그리고 도시로 나갔던 것도 산림이 많아진 이유라 볼 수 있습니다....부족한 식량생산은 수입을 통해 해결했지요. 결국 우리는 식량자급률이 낮은 나라가 되긴 했습니다만...
다만...너무 속도전으로 만든 푸른 숲이라, 앞으로 잘 가꾸어 나가야 하는 과제가 큰 것 같습니다. 불에 잘타는 소나무 위주로 심은데다가 너무 건드리지 않아서, 겨울만 되면 불쏘시개나 땔감이 되어버리는 숲이 너무 많구요...최근에 "탄소중립"의 이유로 오래된 나무를 베어내고 새 나무를 심는다고 산림청이 간벌을 너무 심하게 해서 욕먹고 있는데, 우리나라 숲의 탄소흡수 능력이 떨어지는 것 자체는 맞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뭐라도 해야 하는건 사실인데 정답이라고 할게 별로 없다는게 문제네요...
연탄공급과 같이 산림녹화를 해서 성공한 거죠. 강원도 산불이 소나무의 영항이 크군요..
낙옆과 솔방울 그리고 소나무 잎사귀를 부지런히 모아서 집에 모으는게 일이였습니다.
그래서 산에 가면 뭔가 청소해놓은듯 갈쿠(갈퀴)자국이 자기산이 있는분들은과 지인들은 그곳에서나머지는 국가소유산으로 가야죠뭐. 해질때쯤이면 지게와 경운기 리어커 그리고 굴뚝의 연기 전기도 동시에들어왔다 나가서 상하기 쉬운 고기라도 행사 있어 사놓은 집은 주위집 귀가하면서 굴뚝을 보고 아이를보내서 아직 밥안차렸으면 조금있다와서 식사하시라고 했던 풍경들이 희미하게 생각납니다.
하긴 조부께서 호박잎과 회관에서 꽁초 주워까서 말려서 섞어 연초 만드셨는데 가끔 옛을 회상하시는듯하면서 일제때나
사변때 이야기 춥고 배고프고.. 그때는 하루 한끼니 쌀밥에 뜨신 국물이면 세상 싸울일 없을것 같았는데 종종 밤에 울리는다툼하는 소리 부부쌈하는 소리 너무 길어진다 싶으면 곰방대끼고 나가보시던
풍족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주린 기억은 없고 다만 그때 특정 느낌은 가끔 그리울때가 있습니다.
원래 대통령이란 자리가 그런거 아닌가요?
누군들 그 자리에 있었다면 당연히 해야할일이 아닌가요? 라고 할 것이 아니라 (실제로 안했을 수도 있고)
그런일을 했던 못했던 보통 대통령이 다 욕도 먹고 칭찬도 듣고 했던거 같은데 말입니다.
잘한건 잘한거고 못한건 욕하면 되는게 아닐까 싶네요
녹화사업은 국민 개인이 자발적으로 할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국가가 나서서 한 사업에 국민들이 헌신한 일이기에 박정희의 치적이 아니라며 불신할수는 없습니다.
'저게 뭐하는 짓인가?' 하고 갸우뚱했던 기억이 나네요 ㅋㅋㅋ
다른 나라에서도 녹화사업을 많이 시도 했지만 잘 안됐습니다.
이유는 심으라고 준 나무를 제대로 심지 않거나, 묘복을 그대로 땔깜으로 쓰거나, 심은지 얼마 안되는 나무를 바로 장작으로 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나무를 심을 때 관리 감독을 다른 지방에 있는 사람을 불러다가 했다고 하더군요. (영남-호남 이런식)
그래서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감독을 하고 흠을 잡아 내려고 하고 흠을 안잡히려고 하다보니 제대로 심기가 되고 관리도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심은 나무를 바로 뗄감을 쓰지 않는.. 나쁜일을 하지 말라고 하면 안하는 그런 좋은 우리나라의 국민성도 한 몫했다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합니다.
그 시리즈 중에 일환인 것 같습니다.
박정희가 한 일이 다 잘못한 것일까?
그건 아니겠죠.
박정희가 16년간 집권했습니다.
16년간 잘못된 결과만으로 초래하는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어느 분이 언급하셨지만,
산업화 시기 목재연료에서 화석연료(연탄,기름)로 전환된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을 겁니다.
기적이라고 말하고 싶을 겁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한대기후, 사막 기후 지역 제외하고,
현대의 온대 기후대의 나라 중 민둥산만 있는 나라가 몇이나 있는지...?
북한을 제외하고요.
심지어 중국도 화석연료 대체되고, 중국 여행 가보시면 나무로 채워진 화려한 녹음의 산이 대부분입니다.
이걸 다르다라고 이야기할려면, 북한 비교가 유일할텐데...
겨우 북한보다 낫다는 이야기 꺼내려고 이런 정성 컨텐츠가 작성된 거는 아니길 기원해봅니다.
내용에는 온갖 불가능이다 불가능이었다 말하지만,
결과적으로 저게 저렇지않은 나라가 드문 상황에서 우리나라만의 기적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그거야말로 일부의 분들이 지속 난리치시던 소위 국뽕 수준이 아닐까요?
그러고보니, 이런 글에 국뽕 타령하러 오시던 분들이 아무도없네요.
아..그 분들은 문통 시절에만 그 타령을 하시긴 했었지요
또한 이상한사이트에서 퍼온건 아니었습니다.
산에 나무 많은거...
그 의도가 심히 우려스럽네요.
국민들의 지지를 잃은 현 정부의,
향후 공안,협박 독재 정치를 위한 밑밥 깔기가 아니길 기원해 봅니다.
저만해도 3번이나 가스 중독으로 죽을 고비를 넘겨서 마지막 중독 사건 이후 부모님들은 더이상 온돌 난방을 하지 않고 사셨습니다. 겨울엔 바닥에 두툼하게 카페트를 깔고 양말을 두껍게 신고 지냈죠.
급수식 온돌 보일러가 도입된지 오랜 지금도 겨울엔 아주 약하게 난방하시면서 지금도 실내화 신고 생활하시네요.
조선시대? 그림 보면 산이 참 푸르르게 그려져서 계속 그런줄만 알았어요
밭에 소나무가 있으면 세금을 메겨서 그걸 몰래 캐서 죽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없는 살림에 땅에 나무가 있다고 세금을 메기니 누가 나무를 심었겠습니까?
땔깜 말고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나무였다고 하던데
백년대계를 보고 수종을 골랐으면 좋았을텐데요 ㅠㅠ
공무원을 어떻게하면 일 시킬수 있는지에 대한
교본이죠
'벌거벗은 붉은 산에~' 의미를 알겠네요.
문제는 조선 중후기 부터 온돌이 전국 보급되면서 땔깜으로 마구 써서 남아나지 않은 겁니다.
그러니, 연탄이 보급되고, 나무를 보호하고, 매년 나무 심고 연료를 수입하니까 국내에 나무가 빽빽해진게 당연한겁니다. 이땅의 위치가 원래 그런 곳입니다. 그 전 200년 동안 그꼴 못보고 박박 긁어 땔깜 쓴겁니다.
박정희가 잘한건 맞죠. 그런데 세계 유일..어쩌고 하지만.
세계 유일 성공한 산림녹화산업으로, 비교되는게 사막지방이에요, 아랍지역, 이스라엘 같은 곳들인거죠.
거기는 원래 나무 못키워요. 그러니 사막인데. 거기는 못한거 우리는 한거다 할수가 없는 겁니다.
동일한 위도에 다 나무 많아요. 그런데 거기는 온돌이 없으니, 우리랑 상황이 달랐던거구요.
다만, 가끔 감동하긴 합니다.
제가 어릴때 80년대 90년대.. 모습하고
요즘 모습은 정말 다릅니다.
정말 아름답다고 느껴요..
80-90년대는.. 여름에도 조금씩 조금씩 땅이 보였어요.
90년대 저 군대있을때, 능선을 보라고 배웠습니다. 거기 보면 사람 움직이는게 보인다고...나무가 있어도 지금처럼 자란게 아니었어서 빈곳이 많았죠.
그랬던게 30년을 더 자라고 더 심었죠.
지금은?? 개뿔 산에 있음 겨울 아님 아무것도 안보입니다.
그런데 보수는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그냥 다 빨갱이고 죽여야 할 놈들이라고 하죠. 근거는 없지만 내가 싫으니 빨갱이니까 죽이자..네요.
어릴적에는 뒷동산에 올라가서 미끄럼 타고, 솔방울 던지고, 솔잎가지고 놀았는데
요즘에는 관목과 수풀이 우거져서 아예 들어가지를 못합니다...
산림 녹화의 가장 밑바닥의 근본 원인: 연탄 보금으로 인한 땔깜 소모량의 급격한 감소,,,, (이것 없었으면 아무리 나무 열심히 많이 심었어도 역부족 상황의 악순환이 계속됨.)
아무도 언급 안한 부분만 하나 적을까 합니다
배산임수 지형이 명당인 이유중에 하나가,
겨울철 차가운 북서풍의 영향을 주산이 줄여주고
또한 그 주산에서 땔감을 얻기 쉬웠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반가이 대답하는 산에 사는 메아리 벌거벗은 붉은 산엔 살 수 없어 갔다오.
2.메아리 메아리 메아리가 사는 산 언제나 찾아가서 외쳐 불러도
아무도 대답없는 벌거숭이 붉은 산 메아리도 못살고서 가버리고 없다오.
*.산에 산에 산에다 나무를 심자, 산에 산에 산에다 옷을 입히자, 메아리가 살게시리 나무를 심자
이런 동요가 있던 나라였는데, 잘한건 잘한거죠. 뭘 그렇게 까고 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