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한 사과'로 세상이 떠들썩하다. 사태의 시작은, 한 업체에서 '심심한 사과' 말씀을 드린다는 글을 올렸는데, 이에 네티즌들이 '뭐가 심심하냐'라고 반발하면서 일어났다. 당연히 심심한 사과의 뜻은 지루한 사과는 아니고, 마음 깊이 사과한다는 뜻이다. 이로 인해, 대통령까지 '문해력'을 거론하고 나섰다는데, 개인적으로 이 사태의 핵심은 '어휘력' 보다는 '비난' 자체라고 느낀다.
기존에도 계속 일련의 '한자어'를 놓고, 이를 모르는 세대를 탓하는 일들은 있어왔다. 그러나 나는 일상적으로 쓰지 않는 한자어를 모르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실제로 나도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쓰인 책들을 읽다보면, 모르는 한자어들 투성이다. 언어란 시대에 따라 계속 달라진다. 반대로 보면, 기성 세대는 새로운 세대들이 쓰는 신조어나 외래어는 거의 모르기도 한다. 문제는, 특정 어휘를 알고 모르고가 아니라, 인간 대 인간의 소통에 대한 태도 자체의 변질이다.
업체가 사과 말씀을 전하면서, 심심하니까 대충 사과한다고 말할 리가 없다. 사회적 관계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가 존재한다면, 어떤 어휘를 쓰든 간에 그것이 '진심어린 사과'를 하는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다른 경우도 마찬가지인 것이, 내가 모르는 단어를 누군가 쓰더라도, 특정 맥락 안에서 어련히 적절한 이야기를 했겠거니, 판단할 수 있다. 문제는 그런 소통에서의 신뢰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소통에서 신뢰가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모든 단어 하나하나가 '악의적 오독'의 전쟁이 된다. 당신의 마음을 믿을 수 없으므로, 믿을 수 있는 건 눈 앞에 있는 단어 하나하나 밖에 없다. 우리 시대의 거대한 현상 중 하나가 바로 '말실수 기다리기'다. 연예인이든 정치인이든 사업가든 누구든 단어 하나 실수하기를 기다려서, 득달같이 달려들어 저격하고 악플다는 현상은 이제 매우 보편적이 되었다. 타인의 마음을 믿지 못하므로, 믿을 건 단어 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직조' 같은 어려운 단어를 쓰는 평론가의 마음은 믿을 수 없다. 그는 진짜 평론을 하는 게 아니라 잘난 척하려는 마음으로 그런 어휘를 쓰는 것이다. '심심한 사과' 같은 단어를 쓰는 것은 드디어 사과하기 싫은 마음이 폭로된 '말실수'의 순간이다. 당신들의 진심 같은 건 모두 믿을 수 없다. 진실은 당신들이 쓰는 '이상한 어휘'에 있다. 혹은 정신분석학적인 '말실수'의 순간에 있다. 모든 건 허위이고 거짓이고 위장이므로, 우리는 당신의 팩트를 당신의 어휘에서 발견한다. 바야흐로 정신분석가들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튜브 등에 흥행하는 '저격 문화'를 보면, 우리 사회가 얼마나 타인들의 어휘에 집착하는지 더 알 수 있다. 한 사람이 해왔던 모든 말들을 수집해서 앞뒤가 맞는지 아닌지 분석한다. 나아가 어떤 말실수를 포착하는 순간, 드이어 비열한 '진심'이 나타났다면서 악마화하기 시작한다. 그 어떤 사람도 결코 완벽한 언술행위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은 무시된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악마화'를 일상화하는 세상이 그렇게 착실히 만들어진다.
예전에도 나는 문해력의 위기란 "나와 타자가 속한 맥락을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의 부재라고 쓴 적이 있다. 이런 위기는 바로 타인을 마음대로 재단하고, 비난하고, 저격하는 데 신이 난 문화와 무관치 않다고 이야기했다(<내가 잘못산다고 말하는 세상에게>에도 이 글이 실려 있다). 문제는 어휘가 아니라 맥락이다. 그리고 이 나와 당신 사이의 맥락에 대한 이해는, 당신에 대한 신뢰, 나와 당신이 속해 있는 총체적 의미에서의 '사회'에 대한 신뢰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이 신뢰가 무너진 시대에는, 대화는 없고 어휘만 남는다.
악의적 오독의 시대, 우리는 점점 더 결별 위기의 커플처럼 서로의 말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의 마음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출처 : 정지우 작가님 페이스북 (다른 곳에서 퍼온 글이라 링크는 따로 없습니다)
저는 이 글에 상당히 동의합니다.
어휘력은 시대에 따라 쓰이는 단어가 달라져서 세대가 달라지면 타세대의 언어에 대해 좀 더 모를 수는 있다고 봐요.
예를 들어 it관련 용어는 4~50대 이상보다 2~30대가 더 잘알지 않을까 합니다.
그보다 문제의 본질은 저런 분노로 가득차서 하나만 걸려라하고 잔뜩 날이 선 고슴도치같은 자세라고 봅니다.
서로 뭐 하나만 나오면 죽을 때까지 그 하나로 조지려들고 일단 곡해하고 보려는 태도 말이죠.
이건 일부 세대의 문제가 아니라 요즘 전체적으로 전세대에 걸쳐 팽배하지 않나 합니다.
어느 지점에서 그 수동공격성이 발현하느냐의 차이랄까요.
상대의 선의를 믿지않고 서로 잠재적 적으로만 바라보는 것 같은 슬픈 시대입니다.
아무래도 계속해서 단어, 어휘, 문장, 소통에 관련한 고민을 하는 분들일테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소설에선가 내가 먼저 믿음을 주고 행동하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히 서로에 대한 불신의 벽에 갇혀있을 수 밖에 없다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아마 웹소설이었던 것 같은데 솔직히 깜짝 놀랐습니다. 웹소설에 기대한 통찰이 아니었거든요.)
그러니 저부터도 이런 사회를 탓하기 전에 내가 먼저 상대방의 선의를 믿는 태도를 갖추려고 노력하려 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고슴도치를 비하하려던 것은 아니었으나 상처받았을 고슴도치들에게 심심한 사과를 표합니다.
어휘력은 시대에 따라달라질 수 있으니까요.
아마 주로 사용하는 단어의 숫자로 비교하면 세대별로 큰 차이가 없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그 사용하는 어휘의 종류부터 달라지는 것이 세대간 차이를 드러나게 하는 것이 아닐까합니다.
그리고 모르는 단어가 나왔을 때 화부터 내지 앟고 상대가 어떤 단어를 모른다고 조롱부터 하지 않는 저와 사회가 되길 바랍니다.
한 20여년 전부터 제가 지인들과 하던 대화의 주제 중 하나가 사회적 신뢰의 저하가 가져올 엄청난 사회적 비용 문제였습니다.
관련 연구를 하거나 한 것은 아니라 수치상으로 제시할 수는 없지만 저신뢰 사회에서 드는 간접비용이 상상초월일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저변에는 사회의 불평등, 나의 이기심, 신뢰부족이 깔려있고 그건 결국 사회적 철학 부재, 인본에 기반하는 인문학의 소홀인것만 같아 생산성에만 몰두하는 교육과 경쟁이 아쉽기만 합니다. 해결책은? 리더의 인본중시? 답은 없네요;;
일단 저부터라도 한발짝 물러나서 화를 가라앉히고 관조할 수 있는 태도를 갖도록 노력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도 말하다 보면 점점 언사가 거칠어지는 게 한 두 번이 아니라 사실 매우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네 비슷한 말씀인 것 같습니다.
아마 비슷한 고민을 해오신 분들이 많을거라 생각되네요.
어이구야
관심법을 넘어 판결을 내리는군요 ㅋㅋ
그러게요. 씁쓸하네요.
글 다시 읽고 제 문제점을 알았습니다..
예시로 박제감 이네요 ㅋ
수정나 삭튀는 않하겠습니다 ㅠ
'바야흐로 정신분석가들의 시대다'
해당 문단이 사람들이 그렇게 보는 예시들이 나열된거라 제가 주의깊게 안읽은게 맞더라고요 ㅠ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직조' 같은 어려운 단어를 쓰는 평론가의 마음은 믿을 수 없다. 그는 진짜 평론을 하는 게 아니라 잘난 척하려는 마음으로 그런 어휘를 쓰는 것이다. '심심한 사과' 같은 단어를 쓰는 것은 드디어 사과하기 싫은 마음이 폭로된 '말실수'의 순간이다. 당신들의 진심 같은 건 모두 믿을 수 없다. 진실은 당신들이 쓰는 '이상한 어휘'에 있다. 혹은 정신분석학적인 '말실수'의 순간에 있다. 모든 건 허위이고 거짓이고 위장이므로, 우리는 당신의 팩트를 당신의 어휘에서 발견한다는 방식인 것이다. 바야흐로 정신분석가들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를 들어, "'직조' 같은 어려운 단어를 쓰는 평론가의 마음은 믿을 수 없다." 이 부분을 읽는 순간, 이건 글 쓴 사람의 생각이구나...하면, 그건 그냥 글을 안 읽는 거죠. 글자만 읽고. 바햐흐로 실질 문맹의 시대에요.
창피할 뿐입니다.. ㅎ
맞습니다.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항상해오던 것인데 이렇게 쉬운 글로 표현해주니 역시 식자는 다르다고 느꼈습니다.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해오던 입장에서 이렇게 딱 쉽게 정리해준 글을 보면 너무 반갑더라구요.
에휴... 소통의 의지가 있느냐이전에 그냥 무식한거죠.
물론 어떤 부분은 소통의 부재 이전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렇다해도 그 모른다는 것에 어떻게 반응을 하느냐를 보면 본질적으로 소통과 신뢰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The single biggest problem with communication is the illusion that it has taken place.”
(커뮤니케이션의 가장 큰 문제는 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났다는 착각이다.)
위 글쓴이가 시사한 것처럼 같은 말이라도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의미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말이 만들어진 맥락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수반되지 않으면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매우 동의합니다. 특히 타인에 대해 이해한다고 오해하지 않으려면 부단한 노력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본문에도 댓글에도 매우 공감하는 저이지만 역시나 저도 숱한 오해들로 점철된 일상을 보내고 있을 것 같습니다.
정치의 언어는 또 일상의 언어와 다르지만 개사과 생각하면 이건 그런 차이가 아닌 근본적인 문제라고 생각이 들더군요.
그리고 학습의 결과이기도 하겠죠... 온라인 상에서 의도적으로 사과하라고 하니까 하기싫지만 한다~~ 라는 식의 대응으로 떠들썩 했던 적이 꽤 있었으니까요.
4과문이라는 말도 생겨났구요....
또 일반인들도 말실수를 저격하고 공론화시켜서 조회수로 돈을 벌 수 있는 세상이 됐기도 하고....
사람들 간에 신뢰가 사라지고 있다는게 참 안타깝네요
서로 서로 바짝 날을 세우고 있는 상황이 된 것 같아서 참 씁쓸합니다.
뭐 그렇다고요.;;;
뭐 그렇다고요…
저도 부디 그런 사람이 될 수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 대화의 단절, 소통의 부재에 대한 원인이 서로에 대한 신뢰의 저하가 원인이 아닐까 합니다.
동세대간의 대화 역시 단절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기도 하고요.
한국언론의 총체적 문제는 정말 말을 잃게 할 정도입니다.
그나저나 말 한마디에 득달같이 댓글이 붙으며 물고 뜯는 문화가 팽배한 것도 사실이네요. 클리앙 조차 그럴 때가 있죠.
그쵸. 클리앙이라고 나라고 무슨 용 빼는 재주있어서 이 사회의 흐름과 동떨어져서 오시할 수 있다고 생각치 않습니다.
일단 나부터 조심해야죠.
전문가의.글은 역시 이해가 훨씬쉽고
동의도.잘되네요 ㅎㅎ
사실 원래 사과문은 형식이고
요즘은 금전적사과가 효과적이죠
돈쭐과 금융치료의 시대
나와 비슷한 생각을 잘 정리해준 글을 보면 너무 반갑더라구요.
@미망님
이 댓글에도 한 구간이나 한단어에 꽂혀서 고슴도치 마냥 톡톡 쏘는 분들에게 하는말 같네요.
(한자어의 문제가 아닌데, 사회에서 필요한 단어를 모르면 배우도록 노력을해야지 뜬금없이 한자타령)
일상에서는 그런사람 많지 않지만 유독 인터넷의 익명성뒤에서 톡톡 쏘는게 문제 같애요.
그리고 어휘력은 책도 많이 읽고 대화도 많이 하면 자연스럽게 늘어나는것입니다.
요즘은 부모님, 선생님, 사수등등 인생의 멘토라 할 수 있는 선행(?)자들과의 대화(소통)가 잘 안되는 분들이 좀 있는거 같아요. 꼰대라고 터부시하는.. 듣기 싫어하는..
교육과정에서부터 잡아줘야 한다고 봅니다.
맞습니다. 교육도 바뀔 부분이 있습니다. 또 어떻게 보면 교육 이전에 나와 우리 사회 전체의 분위기도 달라져야할 것 같습니다.
그쵸. 어휘력이 아니라 예를 들어 미국의 수도 이름이라든가, 대한민국 청주의 위치 라든가 하는 걸 모를 수도 있는데
내가 모르는 걸 접했을 때 어떻게 반응하느냐, 타인이 내가 아는 걸 모를 때 내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의 태도의 문제죠.
내가 모르는 건 있을 수가 없고 저 놈이 쓰는 건 일반인 범주를 넘은 허영심의 꼰대적 언어라는 재단도 스스로 해버리고요. (나중에 "사어 한자어 쓰지 마!"로 짜증내는 이유)
그러니까 건수가 아닌 걸 건수라고 우기면 언젠가는 진실이 될 거라는 기우제란 소리네요.
여기서 지편에는 관대하고 적에겐 잔혹한 한동훈의 심리도 알 수 있군요. 음?
과도한 자기확신은 어디서건 문제의 소지가 다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비슷한 생각을 하던 입장에서 다시 한 번 생각을 정리해볼 수도 있어서 좋은 글이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 입니다 ^^
그리고 그 신뢰는 소통을 통해서 쌓아지는 거라는 것도요
저도 너무 동의하는 부분입니다. 사회 전체의 신뢰 저하가 가져온 여러 부작용 중 하나라 생각되기도 합니다.
언젠가 부터 뭔가 불편함을 느꼈는데 바로 이 것이었구나를 깨달았네요. 댓글이 아니라, 그냥 사람들 사이의 대화에서도 이런 경우를 종종 느꼈어요. 마치 텔레비젼 프로그램처럼 말실수를 기다려 면박을 주는 상황 같은 거요.
맥락을 보려는 노력을 좀 더 기울여야겠습니다.
동의합니다. 맥락맹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려합니다.
약간은 정신병적으로 보일 정도입니다.
마음의 여유가 필요하죠.
내기분 상해죄의 문제는 검사판사변호사에 배심원까지 모두 내 마음이라는 점인데 이걸 너무 당연하게 여기는 것 같더라구요.
어휘력, 문해력이 낮아지는 현상의 원인이 과연 그럴까 하는 의구심이 드네요.
지금 학교 현장에서 걱정하는 것은 문해력이 현저하게 낮아지고 있다는 것인데(어휘력은 문해력의 핵심 요소 중의 하나죠.),
단순 문해력 부족만이 문제가 아니라 문해력이 낮아지면서 논리력, 추론 능력 등 고급 사유 능력이 약해지는 것을 걱정하는 것이죠.
몇년전부터 수포자 문제가 대두되었는데, 단지 수학만 문제가 아니라,,,, 문해력이 낮아지면서 모든 과목에서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고 우려하고 있습니다.
어휘력 해프닝은 교육현장이 아닌 데서 이상하다는 걸 인식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해프닝,,,,
이 모든 원인은 현재로서는 인터넷과 유튜브로 대표되는 지식 획득 수단이 텍스트에서 영상으로 바뀐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함무라비 대왕 시절부터 애들은 버릇 없고 무식하다고 여겼듯이, 지금 젊은이 어휘력 약하다고 손가락질 하는 것은 어느 시대나 있는 늙은이의 노파심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꽤 많은데,,,
그냥 함무라비 대왕 시절에는 인터넷, 유튜브가 없었죠.
인류 최초로 텍스트가 정보 획득의 제1 수단이 아닌 세대가 나왔고,
4차 산업혁명이니 뭐니가 인류를 새시대로 안내할 것이라는 장미빛 전망은 동전의 양면처럼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인류의 지적 사유 능력, 고등 사고력의 평균이 낮아질 수 있다는 우려도 역시나 해야 하죠.
(똑똑한 사람은 여전히 똑똑하겠지만, 점수가 매우 낮은 사람이 증가하면서 평균이 하락,,,,)
분명 어휘력의 문제도 일부 있을겁니다. 일단 상당히 자주 쓰이는 문장인 "심심한 사과의 말씀"이라는 걸 처음 본다는 것부터
신문이나 공식적인 문서, 하다 못해 교과서(에 안나오려나요) 등을 듣거나 본 일이 거의 없다는 얘기가 되니까요.
다만 작가분이 지적하는 문제는 어떤 어휘를 모른다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걸 곡해하고 오해하고 확인하는 절차없이 바로 풀악셀을 밟아버리는 부분이죠.
바로 그 지점이 단순히 문해력이나 어휘력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의 선의를 믿지 못하는 저신뢰사회의 문제라 보는 것입니다.
예전부터 비슷한 어휘력 얘기가 나올 때면(예를 들어 사나흘, 명징, 등의 숱한 예시가 있죠) 모른다는 것 그 자체보다
왜 내가 모르는 말을 사용했다고 해서 타인을 그 사실만으로 비난하는가 하는 현상에 대한 문제제기를 해오던 분들이 있었죠.
저도 비슷한 얘기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즉 왜 사람들의 어휘력이 점차 떨어지는가 하는 그 원인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왜 사람들이 상대방의 발언을 선의로 해석하지 않고 공격부터 하려 하는가에 대한 얘기입니다.
'심심한 사과'를 '심심하다'라며 오해하는 건
그나마 낫다고 볼 수 있죠.
'짤짤이'를 '딸딸이'로 해석하는 일도 있는 걸요.
어려운 단어를 써서 문제라고 본다는 거 자체가 그 평론가가 왜 그 단어를 썼는지 맥락을 모르거나 알아 본적이 없어 보이네요.
본인이 비판하는 부분을 스스로에게 비판하고 있는 꼴이네요.
작가는, 모든 사람은, 쉬운 단어를 써야 한다는 단순 이론만으로 '직조'를 까기에는 생각의 폭이 '직조'스러움이 '명징'스럽습니다.
생각의 폭이 플렉서블하고, 상대방에 대해 이해하려고 노력 했으면 좋겠네요.
약간의 오독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읽어보시면 그 부분이 일종의 예시임을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작가본인이 그걸 비판하는게 아니고 이동진을 비난하던 사람들의 생각이 이렇지 않겠는가 하는 예시이죠.
본문 글은 충분히 이해했다고 전제를 쓰지 못한 제 잘못이긴 합니다만,
누군가에게 타깃이 되어 저격 아닌 저격을 받는다는 게 기분이 굉장히 더럽다는 느낌이에요.
이제는 제가 leonato님의 댓글을 이해를 못하게 되었네요;;
작가가 일종의 예시로서 든 케이스 중에 하나가 이동진 평론가의 명징 직조 건인 걸 아시는데
"어려운 단어를 써서 문제라고 본다는 거 자체가 그 평론가가 왜 그 단어를 썼는지 맥락을 모르거나 알아 본적이 없어 보이네요.
본인이 비판하는 부분을 스스로에게 비판하고 있는 꼴이네요." 라는 부분이 이해가 안갑니다.
애초에 이동진 케이스가 성역도 아닌데 비슷한 사건에 대한 예시로 드는 것 자체가 왜 불편한 일인가도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혹시 여유가 되신다면 설명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이동진의 기생충 영화평에 대한 논란도 알고 있습니다.
본문의 저 작가 분이 다른 예시(논란이 없을만한)를 해도 됨에도, 굳이 저 논란 있는 걸 예시로 든다는 게 제 경우 불편해서 댓글로 저 부분에 대해서만 쓴 것입니다. (저 예시를 넣은 것도 제 딴에는 일종의 어그로로 보입니다.)
제가 본문의 내용을 이해 못해서 논란에 항변하는 댓글을 단게 아닌, 논란 부분에 대해 한마디 하고 싶은 심정에 '본문의 주제와 무관한 예시 부분'을 향해 댓글을 달았습니다.
어떤 부분인지 알겠습니다.
다른 예시도 다 논란이 되었던 부분들이죠.
애초에 논란이 안되었다면 우리가 그걸 어떻게 알고 이런 대화를 나눴겠습니까만.
그러나 팬심에 의한 반발이라 이해하고 지나가면 될 것 같습니다.
시간내어 설명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응 통해 “상대방의 생각”을 “이해”하고, “내 생각”을 “논리적으로 표현” 해내는 소통 능력이 문해력이죠.
어느 정도 공감합니다.
근데 문해력 저하 문제 원인에 대해서는 글쎄요..
여러 요인 중 하나는 될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은 모르겠네요.
신뢰 문제로 인한 텍스트 오독 같은 그리 고차원적인 문제가 아닐거 같아요.
그냥 지능 문제지.
그 복잡한 마음과 달라진 세상을 공감되게 정리된 글 같습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 그리고 뉴미디어들이 세상을 얼마나 바꾸었는지요.
긍정적인 방향으로도 어마어마 하지만 그 반대 방향도 어마어마한 것 같습니다.
손안에 사전을 들고다니는 시대잖아요,
예전에 어떤 프로그램 때문이었나 "어의"가 검색어 순위에 오른 게 기사화되기도 했죠.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건 차라리 좋은 현상입니다. 모르면 검색해보고 물어보고 알면되는거니까요.
오히려 왜 그런 오해를 내가 하게 만드냐며 들이 받는 경우가 문제지요.
와닿는 글이네요...
본문 전체를 하나로 꿰뚫는 말인 것 같습니다. 한 줄 요약 감사합니다^^
저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저를 보고 비슷한 생각을 할 때가 있겠죠;;
나부터 말조심하고 먼저 상대의 선의를 믿는 것이 변화의 시작이겠죠.
심심하다는 표현이 진짜 심심하다고 썼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는 합리적 의심을 지울 수 없을 뿐이죠.
물론 그런 특정 [그 분]이 있지만 역시나 그래서 맥락을 봐야하는 것이겠죠.
누구와의 대화인지 그 대화의 대상에서부터 신뢰와 맥락이 생기는건데 그런 걸 다 무시하고
킬각부터 재면 이건 발화자의 문제이기 전에 수용자의 태도문제가 되니까요.
짤짤이가 딸딸이가 되는 과정이죠.
한 마디로 말 꼬투리 잡기.
굉장히 조심해야 하는 부분 같습니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첨단의 IT기술을 누리고 있는 세상으로서
각자의 손에 고성능 컴퓨터를 한 대씩 쥐고 걸어다니는 시대입니다.
지금이 80년대, 90년대였다면, 모르는 단어라든지 어떤 모르는 사실이 있을 경우
그걸 찾아보려면 두꺼운 어학사전이나 백과사전을 뒤져 봐야 했고,
도서관에 가서 자료들을 찾아봐야 했습니다.
지금은요?
스마트폰 화면 켜기 -> 웹브라우저 실행 -> 검색어 입력
채 10초도 안 되는 과정만 거치면, 뭐든지 알아낼 수 있는 세상을 살고 있죠.
"심심한 사과"라는 말을 봤을 때,
다음 네이버 구글 어디든 "심심한 사과"라고 써넣고 검색버튼 한 번만 눌러 봤다면
자신의 무식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전 "사흘" 사건도 마찬가지죠
"이번 연휴는 3일 쉬는데 왜 사흘이라고 써서 헷갈리게 하냐?"라는 긴 문장을 타이핑하는 대신에
검색사이트에 "사흘"이라고 달랑 두 글자만 써넣고 검색버튼 누르는 과정을 먼저 거쳤다면
이 역시도 세상을 향해 "나는 무식한 놈이오" 하고 외치는 참사는 막을 수 있었겠죠.
옛날에는 아는 것, 즉 머릿속에 쌓아둔 지식이 힘이었지만,
이제는 누구나 "알아낼 수 있는 검색도구"를 지니고 있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무언가를 모른다면, 모르는 것은 죄가 아니되
그걸 찾아보려 하지 않는 것이 무식한 것이고
심지어 찾아보지도 않으면서,
자신이 잘못 알고 있는 그 지식을 바탕으로 남을 물어뜯기까지 한다면 더더욱 멍청한 것이죠
바로 그 지점이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모르는 것이 있는게 당연하다는 걸 받아들이고 모르는 단어나 문제에 마주치면 화부터 내지않고 찾아보고 물어보는 것이 바로 태도가 아닐까 합니다.
“쟤 나쁜놈!”
그래? 우르르르
“재 나쁜놈”
그래? 죽여라…
세상을 이분법으로 나눌 수 없는게 분명한데 세상은 0과 1, 좋은 놈과 나쁜 놈, 이득과 손해로 양분하여 판단하기를 원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양분, 이분법에 길들여지다보면 결국 스스로 사고하는 법을 잊어버리고 남이 판단하는 그럴듯한 편결에만 의존하게 됩니다.
스스로의 손에 엄청난 검색 도구가 하나씩 있으면서도 찾아볼 생각은 엄두를 내지 않고 남의 말에 동조하는 세상이 온것 같습니다.
“그래서 결론이 뭔데? 요약해줘!”
라고 하면… 할말이 없겠지만요;;;;
생각해 보니 그렇네요 ^^;;
내가 모르는 것이 있을 때, 그걸 찾아보고 자기자신을 보완하려는 것이 '태도'죠
다만, 이동진 평론가의 '직조'에 대한 부분은 잘 모르겠네요.
영화 한줄 평의 경우, 일상의 언어를 사용할 수 도 있지만 한정된 글자수로 인해 응집된 느낌과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가 더 효과적이기도 해서요.
명징/직조를 가지고 희화화 하던 최광희씨가 생각나네요 :)
저 글쓴이가 이동진 평론가의 '직조' 사용에 대해 비난한 게 아니고요,
'직조' 같은 어려운 단어를 쓰는 평론가의 마음은 믿을 수 없다. 그는 진짜 평론을 하는 게 아니라 잘난 척하려는 마음으로 그런 어휘를 쓰는 것이다. (라고 공격적인 대중들은 생각해서 비난한다)
이런 의미로 쓴 글입니다 ㄷㄷㄷㄷ 다시 찬찬히 잘 읽어 보세요
있는 것들은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특히 불특정 다수에게 피해를 주는) 다 빠져나가고, 없는 사람들을 핍박해도 용인되고...약자들은 비정규직 일도 목숨걸고 해야하고, 그러다 사고로 죽어도 누구 하나 책임지지도, 제대로 보상해주지 않는 사회가 우리나라 사회죠.
이런 사회적 신뢰의 붕괴가 서서히 진행되어 왔다고 보지만
점점 더 강하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어휘력 역시 문제인 것 아니냐는 말씀에는 저도 동의합니다.
다만 신뢰의 저하가 문제다 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심심한 사과, 또는 사흘, 또는 봇물"에 비난의 트윗을 날렸던 분들이 만일 처음부터 앗 내가 잘 모르는 단어가 써있네
그럼 검색해보자. 앗 원래 자주 쓰이는 말이었구나 하나 더 알게되었구나.
라는 태도였다면 애초에 이런 지적이 나오지 않았겠죠. 그래서 전 이 현상의 근본원인은 어휘력 문제가 아니라고 보는 저자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그럼 반대로 애초에 교육이 잘이뤄져서 저런 단어를 처음부터 알았다면 문제가 없었을테니 그 역시 맞지 않느냐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다른 단어에서, 다른 문제에서 또 이런 공격성이 드러나지 않았을까요.
비단 이건 "심심한 사과"건 만이 아니라 현시대를 지배하는 "하나만 걸려라 죽을 때 까지 조져주마" 라는 시대정신에 대한 비판이기에 어휘력 문제는 이 현상에서 지엽적인 부분이 아닐까 합니다.
아무리 독서를 생활화 하더라도 모르는 단어는 나오는 법인데 그러라고 사전이 있지만 그것도 찾아볼 생각조차 안나니...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반성을 하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것이 실수를 바로잡는 시작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