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코로나로 원래 버리던 수박 흰 부분 다 잘라서 반찬 만들어먹었습니다. 저희 집도 아이엠에프때 망했습니다. 저는 초중딩시절이라 부모님께서 힘드셨겠죠ㅜ 비록 내색은 안하셨습니다. 나름 도와드리겠다는 마음으로 하고 싶었던 미술을 접었어요. 지금도 그건 너무 아쉬워요. 아이엠에프로 정말 거의 10년이ㅜㅜㅜㅜ
세이투미
IP 116.♡.109.187
05-04
2022-05-04 00:12:46
·
그때 IMF 로 고생하신분들 많았죠 ... 저도 그때 전공 접고 취업을 했습니다 많이 아쉽기는 해요
백곰곰탱이
IP 222.♡.228.254
05-04
2022-05-04 00:11:14
·
아이엠에프로 집 망해서 대학 전액장학금 받는곳으로 낮춰서 들어가고 졸업해서 취업하고 좀 살만해지나 싶더니 금융위기로 회사 박살나고 다시 취업한 회사에서 돈 좀 모아서 자영업 했는데 코로나로 또 박살났네요. 10년에 한번씩 망하네요 망하는거 지겹네요 ㅠㅠ
세이투미
IP 116.♡.109.187
05-04
2022-05-04 00:13:35
·
그러네요 ... 딱 10년 주기로 너무 힘듭니다
daehyun14
IP 175.♡.30.108
05-04
2022-05-04 00:12:31
·
2천원짜리 샌드위치로 매일매일 연명했어요 ㅠㅠ 😭
세이투미
IP 116.♡.109.187
05-04
2022-05-04 00:14:32
·
그때 주머니에 라면 한개 사먹을 돈도 없어서 ... 너무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지식공장
IP 106.♡.64.202
05-04
2022-05-04 00:14:48
·
비가 많이 오면 집이 물에 잠기는 반지하도 아닌 지하2층에 어릴적 살았습니다. 매일밤 서걱서걱 바퀴벌레들이 기어다니고 머리위로 기어다니고 그런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29세에 노숙으로 한달 생활 했습니다. 20대 이전부터 몸 상태가 안좋아서 별 다른 일은 찾지도 못하고 하루 벌어 하루 끙끙 앓았었죠. 그러다 보니 약 값에 병원비, 나가는게 많더라구요 감당이 안될 정도로 부모님 두분 다 일찍 돌아가시고 형제들도 다 힘든 상황에 손 내밀기도 어렵고 다 내가 감당 해야 했어요. 그러다 돈은 떨어지고 월세 방에서도 쫓겨 나다 싶히 나와서 거리를 배회 했던 그렇게 한달여간 일도 못 잡고 몸은 피폐 해지고 그때 때우던 초코파이 한봉지와 율무차 한잔이 하루 식사 였어요 몸이 감당 안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꼈죠. 한달을 그렇게 간당간당 지내다가 아는 동생의 상황을 듣고 도움을 받아 어찌어찌 살아 왔어요 뭐 지금도 더 나아진건 없지만 그래도 바닥을 치고 땅 속으로 들어갔다 나와 보니 지금은 견딜만 하네요 피폐 한 시간 속에서 간에 무리가 왔는지 간이 맛이 갔더라구요 ^^; 오늘도 하루 살아 있어 그것으로 족하네요 이 하루가 마지막이다 생각 하고 웃으며 지냅니다 좋은 밤 되세요 😊
저는 시골이라... imf 영향은 없었지만.. 아빠가 뇌졸증으로 쓰러지신 후 집안이 망해서... 바퀴 드글한 자취방에 살면서 신발 살 돈이 없어서 엄마 집 갔다가 엄마 신발 훔쳐 신고 온거요 ㅎㅎ.. 걸어서 1시간 거리를 버스비가 없어서 걸어가서 알바하고.. 통장에 .. 그나마 저는 천원 정도는 있었네요^^;;;;;; 알바하다 손님 남긴 음식 몰래 집어먹으면서 살았던 기억이....ㅠㅠ
삭제 되었습니다.
삭제 되었습니다.
현미정식
IP 222.♡.75.215
05-04
2022-05-04 01:04:43
·
90년대 후반에 돈이 없는데 안갈수 없는 결혼식이라 참석하고 축의금 없어서 밥 안먹고 그냥 나와서 집까지 걸어왔습니다. 그때 국수가 제일 오래 먹을수 있는거라서 김치 없이 그냥 간장에 비벼먹는것도 몇달 했어요. 지금도 동생에게 제일 미안한게 동생이 하교해서 먹을려고 남겨둔 식빵 두조각을 제가 먹어버려 굶고 자게 만든거요.. 지금은 매일 고기반찬 먹고있어요.
아어리
IP 118.♡.139.6
05-04
2022-05-04 01:10:04
·
글 쓰신분 그리고 댓글 다신 분들 모두 존경스럽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다시 한번 제 삶을 돌아보며 감사하게 되네요ㅠ
skeptic
IP 27.♡.65.5
05-04
2022-05-04 01:25:29
·
매일 오늘 죽을까, 내일 죽을까. 그런 고민을 하긴 했었죠. 그래도 서울이 당시에도 상수도는 괜찮아서 배고프면 수돗물 마시고 괜찮았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중고생 시절에 점심을 수돗물이 아니라 엉성한 도시락이라도 먹었으면 지금보다는 조금은 똘똘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이 가끔 들기는 합니다.
눈쌓인소나무
IP 112.♡.125.174
05-04
2022-05-04 01:27:43
·
신랑이 교통사고로 인해 운전면허 취소에 직장을 잃었을때~ 교회에서 쌀과 주일 예배 식사때 나오는 반찬을 싸주셨고, 아들둘 1주일에 한번씩 편의점 알바하는데 나오는 폐기 챙겨다가 먹기도 했네요~~ 물런 겨울 난방은 석유통으로 필요할때만 1통씩 받아서 온수와 보일러 터지지 않을 정도로만 약하게 돌리고 집에서는 양말에 두꺼운 옷 챙겨 입고 다 큰 아들들과 한방에서 붙어서 잤습니다~~그렇게 2년정도 버텼지요~~ 지금은 풍족하진 않아도~ 보일러에 등유를 가득 채울수 있을 정도는 됩니다~~^^
얼룩배기황소
IP 121.♡.189.248
05-04
2022-05-04 01:48:05
·
어머니가 저를 가지셨을땐 굶으셨고 그래서 그런지 제가 아직도 건강이 빌빌됩니다. 그후 쌀과 김치 밖에 없었어도 그래도 굶지는 않았고 초등때는 반지하 단칸방에 6식구 살았고 중학교때는 그래도 지상 단칸방이였고 그후 경제사정은 풀려서 남들보다는 못해도 흉내는 내면서 살았네요. 다른분들은 심각하신분들 많았군요.
매일한가한
IP 220.♡.15.218
05-04
2022-05-04 02:03:26
·
어릴때 준비물이 도화지 한장 이었는데 진짜 어머니가 10원 한장 없으셔서 5원짜리 몇개 주셨었죠.(이미 안쓰이던시기) 문구점에서 그 돈은 못쓰는거라고 해서 도화지 못 샀던 기억이 30년도 넘게 지난 지금까지 남아 있네요.
정규 교육과정 국졸이 전부. 국졸 후 바로 취업(? 그 땐 어려도 그냥 취업) 모 회사 구내식당 창고 개조 방에서 생활… 야학이라 무료로 검정고시과정 알려주시던 멋진 대학생 선생님들께 배워, 중고과정 검정고시, 대학과정은 사이버대…
직장(?)생활 안 한 기간이 몇년 안되니, 삶의 약 70% 이상을 돈버는데 썼네요. 많이 벌진 못하지만…
나름… 열심히 산거 갔습니다만 아쉬운게 꽤 있네요…
내 나이, 이제 50대 중반이군요…
모공
IP 14.♡.137.54
05-04
2022-05-04 02:26:31
·
IMF,,, 나와 전혀 상관없이, 타인으로 인해 하루 아침에 빚쟁이가 됐었습니다. 참,,, 속상했던건, ㅂ랄 친구라 믿었던 친구들에게 느꼈던 그 감정... 눈초리...은근히 피하는 모습... 지금도 잊지 못하죠,,, 이젠 다시 모임도 하고있고, 연락도 하곤 있지만, 만약,,, 그 친구들이 어려워져서, 내게 부탁을 한다면,,,, 그 순간 그들은 친구가 아니라 그냥 남 입니다.
오늘, 그동안 준비했던, 특허 출원을 위해 변리사에 연락해서 물어보니... 특허 출원 가능성이 상당히 놓으니, 가능하면 얼른 진행하는게 낳을듯하다고 하여,, 계약금?..입금하고, 도면도 보냈네요... 만약 특허가 출원된다면, 제일 배 아파할 사람들이 지금 제가 친구라고 믿고있던 놈들 아닐까 합니다...
저는 세상 헛 살았어요..
늘때
IP 218.♡.78.8
05-04
2022-05-04 06:18:58
·
@모공님 그들이 원래 그런거를 늦게 안거죠. 님께서 잘못 사신거 아녜요. 좋은 사람들 만나실겁니다.
열아홉에 독립해서 살았는데 라면스프에 물타서 많이 먹었죠 ㅎㅎ 너무 배고프면 별생각이 다나는데 그래도 어린나이에 자존심이 있어서 티 안나게 살려고 노력많이 했어요. 다만 일을 해줘도 돈을 입금하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는 인간들 때문에 한계까지 몰렸었는데.. 한번은 며칠 굶다가 날도 춥고 이런식이면 진짜 죽겠더라구요. 그러다가 봉지를 가게 가져가면 50원 주는 제도가 생각나서 버려진 봉지를 몇 개 주워서 카운터에 내밀면서 제일 싼 컵라면 하나를 들고 이걸로 결제되냐고 했는데 하필 젊은 아가씨가 가게를 보고 있어서.. 비닐 내미는 것만으로도 창피했는데 혐오스럽게 쳐다보면서 안받더군요. 그렇게 공짜나 마찬가지로 얻은 게 뜨거운 물 부어먹는 라볶이였는데 처음 먹어봐서 물을 조금 붓고 따라 내버려야되는걸 모르고 물이 한강이 된 상태로 먹었어요. 완전 맹물맛이었는데 빈속이라 토할것 같은 느낌?이었네요. 가끔 생각나는 젊을때 장면입니다. 지금은 돈도 많이 벌어서 애들한테도 아낌없이 쓰니까 행복해요.
알카라인
IP 219.♡.118.149
05-04
2022-05-04 02:54:35
·
어릴 때 화장실이 없는 집에 살았어요. 연립지하실이었는데 큰일을 보려면 2층 주인집의 벨을 눌러야 했어요. 부모님은 멀리 떨어진 상가화장실을 쓰셨는데 어린 저는 거기까지 참고 가지 못하니까요. 남의집 현관에 서서 화장실을 쓰러왔다고 말해야 했던게 어린 마음에도 너무 괴롭고 창피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런 지하실에서 6년을 살다가 화장실이 있는 집으로 이사했을땐 너무 기뻐서 청소는 매번 제가 했어요.
저는 신혼때 와이프랑 레스토랑을 갔는데, 그때도 돈이 많지는 않아서 (아주 가난하지는 않았지만 풍족하지는 않은 정도) 음식을 조금밖에 못시키고 먹고 있었어요. 근데 옆자리에 누가 소세지 큰거를 남기고 갔더라고요. 그래서 슬쩍 그 소세지를 가져다가 맛있게 먹었어요. 맛나게 먹고 후다닥 나온 기억이 있네요.. ㅎㅎ
IMF 때 개강 파티 갈 돈 만원을 아버지가 못주셨습니다. 그 길로 개강파티 대신에 알바를 구하러 갔습니다. 저녁은 500원짜리 핫도그 먹고 일하러 다녔네요. 한달에 20만원 가량 받았는데 그 돈으로 용돈도 쓰고 모아서 하드디스크 사서 PC 압그레이드도 하고 했네요. 1999년 ~ 2000년 얘깁니다.
개발자
IP 1.♡.145.173
05-04
2022-05-04 07:24:41
·
와,, 저도 힘들게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댓글 보다 보니 철 없이 생각했네요. 모두 과거 이야기니 지금은 넉넉하고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대학 입학 하고 한 달 4만원짜리 초가집에 2년 살면서 다시는 이런곳에 살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기억이..
하쏘우
IP 106.♡.128.224
05-04
2022-05-04 07:31:19
·
유치원때 집에 쌀이 없어서 길거리에 떨어진 음식들 주워먹고 다녔는데. 토사물 먹으려던걸 어떤 식당 아주머니가 막고 대리고 있으시다가 노가다일끝난 아버지에게 저를 안겨주셨는데 그날이 저희 아버지 처음으로 우시는걸 본 날 입니다.
삭제 되었습니다.
카르마2021
IP 121.♡.39.78
05-04
2022-05-04 07:36:56
·
중학생때 집주인이 내쫗아서 친구집에서 한달 살았습니다. 그놈의 재개발 때문에 집주인 아들이 딱지받으려고 임차인들 다 내쫗은건데 막노동하시던 아버지는 그때 공사장에서 떨어져 병원에서 입원하셨죠. 한달 친구집에서 살던중 학교 마치고 어머니 손에 끌려 외할머니집. 정확히는 외삼촌집에서 몇달 살았습니다. 진짜로 학교에서 수도물로 배채워도 봤네요. 그뒤로도 부모님 인생은 잘 안풀렸지만 저는 운이 좋아 나름 잘 지내네요.
아리아리션
IP 122.♡.210.134
05-04
2022-05-04 07:39:28
·
저희집은 imf 3년전에 이미 연대보증으로 날라가서 imf가 와도 그냥 그랬어요. 쓰레기더미 옆에서 잔적도 있고 그러네요. 지금은 뭐 밥벌어먹고 살고 있어서 행복하죠
삭제 되었습니다.
ak47
IP 112.♡.64.22
05-04
2022-05-04 07:42:44
·
IMF때 부모님이 빛쟁이에 쫒기면서, 시흥시 허허벌판에 있던 폐컨테이너에서 살아봤습니다. 지금은 그곳이 아파트촌이 되었네요. 그때를 기억하며 악착같이 살아서 지금은 풍요롭게,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clovis
IP 104.♡.243.26
05-04
2022-05-04 07:49:56
·
아버님이 하던 건설 장비업 직격탄 맞았죠 어음 다 부도 맞고 수입은 없고.. 어머니께서 이모들께 돈 빌려서 아버지 매달 나가는 대출금 등등 갚고.. 아버지께서는 힘드셔서 술 드시고 들어오셔서 우시고.. 전 학교 2학년 1학기 마치고 휴학.. 동생도 학교 서울 상위권 갈 점수 낮춰서 지방 공대 가고.. 뭐 저도 공대였지만.. 동생 대학 등록금 기한 마지막날 겨우 겨우 어머니께서 작은 이모께 현금 빌려서 저보고 아르바이트 가기전에 동생 학교 가서 대신 내주고 오라고.. 그러다가 군대 입대하고 나서 도저히 눈에 밟혀서 상병때 하사 지원해서 8년 군대 있다가 전역하고.. 아이엠에프 당시 진짜 건설사들 부도 날때마다 아버지는 전화 붙들고 집에는 딱지 붙고… 겨우 겨우 딱지 붙던거 어떻게든 막고 하이고…
LIMKONG
IP 223.♡.95.241
05-04
2022-05-04 07:50:55
·
IMF사태로 돈이없어 학원끊었는데 학원에서 무료로 들으라고 해서 공부계속했습니다.
내삶의구원이재명
IP 113.♡.190.97
05-04
2022-05-04 07:52:57
·
ps의 마지막 줄만 빼면 완벽할텐데 굳이 쓰셔서....
알이랑
IP 175.♡.35.100
05-04
2022-05-04 08:28:32
·
@척추부러져도문재인님
마지막 줄이 어때서요. 저는 좋구먼
IP 116.♡.18.63
05-04
2022-05-04 08:47:44
·
@척추부러져도문재인님
모공에서 꿀빤 세대라는 글만 10여번 봤습니다. PS에 적극 공감합니다.
lollollol
IP 223.♡.78.92
05-04
2022-05-04 07:53:55
·
imf 최악의 국가환란이 터져 그 충격파를 온몸으로 맞았지만 그 고난을 극복해내고 한걸음 더 도약하는 시대를 살아온 것이 40대 전후의 세대이죠.
짜장77
IP 106.♡.194.218
05-04
2022-05-04 07:56:45
·
3일정도 굶다가 근처 결혼식장가서 부탁해서먹은적있습니다
화이트리카
IP 42.♡.60.141
05-04
2022-05-04 07:57:08
·
4~5일정도 굶었나 온집안을 뒤져 430원인가 찿았는데 라면하나 살돈이 안되더라구요 도저히 편의점은 못가겟고 조금 떨어진곳에 어르신이 새벽까지 하는 가게 앞에서 이 돈으로 ㅇㅅㅌㅁ 하나만 주시면 안되겟냐고 부탁해볼까....하면서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서성거렸던 기억이 납니다
다쓰붸이다
IP 14.♡.183.120
05-04
2022-05-04 07:57:11
·
집안 사업이 여러 번 망했어도 가난이라고 할만했던 경험은 없네요...-ㅇ-;;; 어떻게든 먹고는 살았던 것 같습니다...
imf 즈음 부모님 사업이 망하고, 대학교 다닐때 알바로 등록금하고 생활비 벌어서 다녔는데, 어찌어찌 간당간당하게 유지하다가 결국 돈이 떨어져서 며칠 굶은적 있습니다. 몇끼 굶고 나니까 누가 밥 좀 사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는데, 친구한테 밥사달라는 말이 정말 안나오더라구요. 집에 지갑을 두고 왔던거라면 쉽게 했을 말인데, 돈이 없어서 하는 말은 구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저도 그때 전공 접고 취업을 했습니다
많이 아쉽기는 해요
딱 10년 주기로 너무 힘듭니다
너무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저도 그떄는 라면이 지겨웠습니다
여친에게 라면과 부탄가스 살 돈을 빌린 적 정도는 있습니다.
그때는 정말 절망이 뭔지 알겠더군요
고등학교 때는 1시간 거리. (고3 때는 길 새로 생겨서 40분 거리.)
차비 아끼려고 걸어서 등하교 했습니다.
그래야 할 정도의 형편은 아니었는데 궁상이라고 어머니는 뭐라 하십니다.
버스 타고 다니기도 하고, 의식주가 크게 불편하진 않았으니 정말 가난했던 건 아닐텐데
어린 나이라 그랬는지 집에 여유가 없는 게 아주 크게 느껴졌던 거 같습니다.
겨울 초입이었는데 반지하 단칸방 도시가스 수도 전기세 독촉장은 날아오는데 끊지는 않더라구요. 사람 죽을까봐...
온 가족이 이 악물고 반지하 투룸으로 이사가고 그 뒤에는 작은 아파트, 2010년 즈음에는 부모님 빚 청산, 2011년에 대출 만땅 땡겨서 집 사고... 결혼하고...
어찌저찌 식구들 배는 곯지 않게 되었습니다.
10년 걸리는군요
저도 10년차인데 마무리되가고 있습니다
온 가족이 힘을 합쳐서 죽을 똥 살 똥 악착같이 돈을 모았습니다.
바람아래간장게장님께서도 고생 많으셨고 이제 일이 점점 풀리실겁니다.
20대 이전부터 몸 상태가 안좋아서 별 다른 일은 찾지도 못하고 하루 벌어 하루 끙끙 앓았었죠. 그러다 보니
약 값에 병원비, 나가는게 많더라구요 감당이 안될 정도로 부모님 두분 다 일찍 돌아가시고 형제들도 다 힘든 상황에
손 내밀기도 어렵고 다 내가 감당 해야 했어요.
그러다 돈은 떨어지고 월세 방에서도 쫓겨 나다 싶히 나와서 거리를 배회 했던 그렇게
한달여간 일도 못 잡고 몸은 피폐 해지고 그때 때우던 초코파이 한봉지와 율무차 한잔이 하루 식사 였어요
몸이 감당 안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꼈죠.
한달을 그렇게 간당간당 지내다가 아는 동생의 상황을 듣고 도움을 받아 어찌어찌 살아 왔어요
뭐 지금도 더 나아진건 없지만 그래도 바닥을 치고 땅 속으로 들어갔다 나와 보니 지금은 견딜만 하네요
피폐 한 시간 속에서 간에 무리가 왔는지 간이 맛이 갔더라구요 ^^;
오늘도 하루 살아 있어 그것으로 족하네요
이 하루가 마지막이다 생각 하고 웃으며 지냅니다
좋은 밤 되세요 😊
글 쓸수 있어 다행이고 감사하네요
모두들 참 잘해내셧습니다.
제 이야기는 뭐 참 별거 아닌데...그래도
국민학교 1학년 시절에
학교에서 준비물 챙겨오라고 첨 말듣고
집에가서 전했더랬는데요
문방구파는 공기돌 10개 아니면 바둑돌 10개 챙겨오라더라구요
숫자세는거 가르칠 모냥이었나 봐요 뭐 하여튼
그 이야기를 엄마한테 전햇더니
곰곰 생각하던 엄마가
제 손을 잡고 길가에 나가 조그만 돌맹이 10개를
주워 제손에 쥐어 줬었죠
참 기억에 남는게
그걸 들고간 제 손을 바라보던
남자 담임샘의 떨리던 눈빛,
갈곳잃은 눈동자...ㅎㅎㅎ
아버지 사업 실패로… 아파트 생활과 가정부고 쓰던 생활에서, 친척집 살이로 …
학교 준비물 필요하단 말도 못 꺼내고 아침에 혼자 목 놓아 울었던 기억이…
정규 교육과정 국졸이 전부.
국졸 후 바로 취업(? 그 땐 어려도 그냥 취업) 모 회사 구내식당 창고 개조 방에서 생활…
야학이라 무료로 검정고시과정 알려주시던 멋진 대학생 선생님들께 배워, 중고과정 검정고시, 대학과정은 사이버대…
직장(?)생활 안 한 기간이 몇년 안되니, 삶의 약 70% 이상을 돈버는데 썼네요. 많이 벌진 못하지만…
나름… 열심히 산거 갔습니다만 아쉬운게 꽤 있네요…
내 나이, 이제 50대 중반이군요…
참,,, 속상했던건, ㅂ랄 친구라 믿었던 친구들에게 느꼈던 그 감정... 눈초리...은근히 피하는 모습...
지금도 잊지 못하죠,,, 이젠 다시 모임도 하고있고, 연락도 하곤 있지만,
만약,,, 그 친구들이 어려워져서, 내게 부탁을 한다면,,,, 그 순간 그들은 친구가 아니라 그냥 남 입니다.
오늘, 그동안 준비했던, 특허 출원을 위해 변리사에 연락해서 물어보니...
특허 출원 가능성이 상당히 놓으니, 가능하면 얼른 진행하는게 낳을듯하다고 하여,,
계약금?..입금하고, 도면도 보냈네요... 만약 특허가 출원된다면,
제일 배 아파할 사람들이 지금 제가 친구라고 믿고있던 놈들 아닐까 합니다...
저는 세상 헛 살았어요..
그들이 원래 그런거를 늦게 안거죠.
님께서 잘못 사신거 아녜요.
좋은 사람들 만나실겁니다.
왠 빈댓글이죠?
어이없군요.
너무 배고프면 별생각이 다나는데 그래도 어린나이에 자존심이 있어서 티 안나게 살려고 노력많이 했어요.
다만 일을 해줘도 돈을 입금하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는 인간들 때문에 한계까지 몰렸었는데..
한번은 며칠 굶다가 날도 춥고 이런식이면 진짜 죽겠더라구요.
그러다가 봉지를 가게 가져가면 50원 주는 제도가 생각나서
버려진 봉지를 몇 개 주워서 카운터에 내밀면서 제일 싼 컵라면 하나를 들고 이걸로 결제되냐고 했는데
하필 젊은 아가씨가 가게를 보고 있어서.. 비닐 내미는 것만으로도 창피했는데 혐오스럽게 쳐다보면서 안받더군요.
그렇게 공짜나 마찬가지로 얻은 게 뜨거운 물 부어먹는 라볶이였는데
처음 먹어봐서 물을 조금 붓고 따라 내버려야되는걸 모르고 물이 한강이 된 상태로 먹었어요.
완전 맹물맛이었는데 빈속이라 토할것 같은 느낌?이었네요.
가끔 생각나는 젊을때 장면입니다.
지금은 돈도 많이 벌어서 애들한테도 아낌없이 쓰니까 행복해요.
연립지하실이었는데 큰일을 보려면 2층 주인집의 벨을 눌러야 했어요.
부모님은 멀리 떨어진 상가화장실을 쓰셨는데 어린 저는 거기까지 참고 가지 못하니까요.
남의집 현관에 서서 화장실을 쓰러왔다고 말해야 했던게 어린 마음에도 너무 괴롭고 창피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런 지하실에서 6년을 살다가 화장실이 있는 집으로 이사했을땐 너무 기뻐서 청소는 매번 제가 했어요.
수도 전기 가스 다 끊겨서 지하철역에서 살다시피했고요
모두 과거 이야기니 지금은 넉넉하고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토사물 먹으려던걸 어떤 식당 아주머니가 막고 대리고 있으시다가 노가다일끝난 아버지에게 저를 안겨주셨는데
그날이 저희 아버지 처음으로 우시는걸 본 날 입니다.
그놈의 재개발 때문에 집주인 아들이 딱지받으려고 임차인들 다 내쫗은건데 막노동하시던 아버지는 그때 공사장에서 떨어져 병원에서 입원하셨죠.
한달 친구집에서 살던중 학교 마치고 어머니 손에 끌려 외할머니집. 정확히는 외삼촌집에서 몇달 살았습니다.
진짜로 학교에서 수도물로 배채워도 봤네요.
그뒤로도 부모님 인생은 잘 안풀렸지만 저는 운이 좋아 나름 잘 지내네요.
쓰레기더미 옆에서 잔적도 있고 그러네요.
지금은 뭐 밥벌어먹고 살고 있어서 행복하죠
지금은 그곳이 아파트촌이 되었네요.
그때를 기억하며 악착같이 살아서 지금은 풍요롭게,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음 다 부도 맞고 수입은 없고..
어머니께서 이모들께 돈 빌려서 아버지 매달 나가는 대출금 등등 갚고..
아버지께서는 힘드셔서 술 드시고 들어오셔서 우시고..
전 학교 2학년 1학기 마치고 휴학..
동생도 학교 서울 상위권 갈 점수 낮춰서 지방 공대 가고..
뭐 저도 공대였지만..
동생 대학 등록금 기한 마지막날 겨우 겨우 어머니께서 작은 이모께 현금 빌려서 저보고 아르바이트 가기전에 동생 학교 가서 대신 내주고 오라고..
그러다가 군대 입대하고 나서 도저히 눈에 밟혀서 상병때 하사 지원해서 8년 군대 있다가 전역하고..
아이엠에프 당시 진짜 건설사들 부도 날때마다 아버지는 전화 붙들고 집에는 딱지 붙고… 겨우 겨우 딱지 붙던거 어떻게든 막고 하이고…
마지막 줄이 어때서요.
저는 좋구먼
모공에서 꿀빤 세대라는 글만 10여번 봤습니다.
PS에 적극 공감합니다.
온집안을 뒤져 430원인가 찿았는데 라면하나 살돈이 안되더라구요
도저히 편의점은 못가겟고 조금 떨어진곳에 어르신이 새벽까지 하는 가게 앞에서 이 돈으로 ㅇㅅㅌㅁ 하나만 주시면 안되겟냐고 부탁해볼까....하면서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서성거렸던 기억이 납니다
어떻게든 먹고는 살았던 것 같습니다...
몇끼 굶고 나니까 누가 밥 좀 사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는데, 친구한테 밥사달라는 말이 정말 안나오더라구요.
집에 지갑을 두고 왔던거라면 쉽게 했을 말인데, 돈이 없어서 하는 말은 구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속도 모르는 친구들은 부자집 아들이 왜 돈을 안쓰냐고 밥좀 사라고 하고..참
지금 와이프와 순대국을 하나만 시켜 찌개마냥 둘이 퍼 먹었던 기억도 있네요.
정말 돈이 없으면 구걸이 되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 요청하기가 힘들다는 걸 깨달았었습니다.
제발 돈 걱정 좀 안해봤으면 하며 20대를 정신없이 보낸 결과,
지금은 종부세 내며 살고 있습니다.
IMF 꿀빤 세대..라고 말하는 분 있으면 진심으로 그 양반 따귀도 때릴 수 있습니다.
근데 그 전에 초등학교때까지는 아버지 가게에서 생활했죠....구석 아주 작은 골방에 있다가 가게 끝나고 나면
가게 바닥에 호루(?) 파란색 비닐같은거 깔고 그 위에 이불 올려놓고 잤죠~
근데 그 기억때문인지 부모님은 투자도 안하시고 돈도 안빌려주시고 보증도 안서시고 해서
그 담부터는 괜찬았던거 같아요
그래도 김대중 대통령 때 아버지 사업이 조금씩 살아나면서 나아지더니 노무현 대통령 때 진짜 일이 잘 풀려서 빚도 갚고 집도 사고 그랬었죠
근데 이명박 XX때 힘들어지고 박근혜 때 망할 뻔하다가 문통 때 다시 잘 풀려서 빚갚고 그랬네요
전 지금도 가난을 이기게 해준 김대중 대통령을 가장 존경합니다
댓글 하나하나 다 읽고 공감 눌렀습니다
술김에, 그리고 옛날 생각에
그냥 적었던 글인데
많은 분들이 공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모두 어려운 시절, 고생하셨습니다
제 나이 52살.
지금이 인생의 화양연화입니다.
가난을 극복하는데 20년 중간계층으로 이동하는데 5년 정도 걸린듯 합니다.
뒷 돌아본 청소년기의 나와
청년기의 힘들어하던 날 본다면
위로해 주고 싶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지금 이 모든 걸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한 미래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부시게
당신은 그럴자격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