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대학생때 IMF로 집안 망하는 바람에
주머니에 백원도 없어,
옆집 배달음식 남긴거 주워 먹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그냥 배고파서 허겁지겁 먹었는데
다먹고 나니 눈물이 흐르더라구요 ...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 입니다
P.S :
지금은 그럭저럭 잘 삽니다
혹시라도 동정하실까봐 ...
우리가 절대로 꿀빤 세대가 아니라는 말 하고 싶네요
저는 대학생때 IMF로 집안 망하는 바람에
주머니에 백원도 없어,
옆집 배달음식 남긴거 주워 먹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그냥 배고파서 허겁지겁 먹었는데
다먹고 나니 눈물이 흐르더라구요 ...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 입니다
P.S :
지금은 그럭저럭 잘 삽니다
혹시라도 동정하실까봐 ...
우리가 절대로 꿀빤 세대가 아니라는 말 하고 싶네요
명사 1. 서명 2. 서명(하기) 3. 특징
저도 그때 전공 접고 취업을 했습니다
많이 아쉽기는 해요
딱 10년 주기로 너무 힘듭니다
너무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대학교때네요.
저도 그떄는 라면이 지겨웠습니다
여친에게 라면과 부탄가스 살 돈을 빌린 적 정도는 있습니다.
그때는 정말 절망이 뭔지 알겠더군요
고등학교 때는 1시간 거리. (고3 때는 길 새로 생겨서 40분 거리.)
차비 아끼려고 걸어서 등하교 했습니다.
그래야 할 정도의 형편은 아니었는데 궁상이라고 어머니는 뭐라 하십니다.
버스 타고 다니기도 하고, 의식주가 크게 불편하진 않았으니 정말 가난했던 건 아닐텐데
어린 나이라 그랬는지 집에 여유가 없는 게 아주 크게 느껴졌던 거 같습니다.
겨울 초입이었는데 반지하 단칸방 도시가스 수도 전기세 독촉장은 날아오는데 끊지는 않더라구요. 사람 죽을까봐...
온 가족이 이 악물고 반지하 투룸으로 이사가고 그 뒤에는 작은 아파트, 2010년 즈음에는 부모님 빚 청산, 2011년에 대출 만땅 땡겨서 집 사고... 결혼하고...
어찌저찌 식구들 배는 곯지 않게 되었습니다.
10년 걸리는군요
저도 10년차인데 마무리되가고 있습니다
온 가족이 힘을 합쳐서 죽을 똥 살 똥 악착같이 돈을 모았습니다.
바람아래간장게장님께서도 고생 많으셨고 이제 일이 점점 풀리실겁니다.
20대 이전부터 몸 상태가 안좋아서 별 다른 일은 찾지도 못하고 하루 벌어 하루 끙끙 앓았었죠. 그러다 보니
약 값에 병원비, 나가는게 많더라구요 감당이 안될 정도로 부모님 두분 다 일찍 돌아가시고 형제들도 다 힘든 상황에
손 내밀기도 어렵고 다 내가 감당 해야 했어요.
그러다 돈은 떨어지고 월세 방에서도 쫓겨 나다 싶히 나와서 거리를 배회 했던 그렇게
한달여간 일도 못 잡고 몸은 피폐 해지고 그때 때우던 초코파이 한봉지와 율무차 한잔이 하루 식사 였어요
몸이 감당 안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꼈죠.
한달을 그렇게 간당간당 지내다가 아는 동생의 상황을 듣고 도움을 받아 어찌어찌 살아 왔어요
뭐 지금도 더 나아진건 없지만 그래도 바닥을 치고 땅 속으로 들어갔다 나와 보니 지금은 견딜만 하네요
피폐 한 시간 속에서 간에 무리가 왔는지 간이 맛이 갔더라구요 ^^;
오늘도 하루 살아 있어 그것으로 족하네요
이 하루가 마지막이다 생각 하고 웃으며 지냅니다
좋은 밤 되세요 😊
글 쓸수 있어 다행이고 감사하네요
모두들 참 잘해내셧습니다.
제 이야기는 뭐 참 별거 아닌데...그래도
국민학교 1학년 시절에
학교에서 준비물 챙겨오라고 첨 말듣고
집에가서 전했더랬는데요
문방구파는 공기돌 10개 아니면 바둑돌 10개 챙겨오라더라구요
숫자세는거 가르칠 모냥이었나 봐요 뭐 하여튼
그 이야기를 엄마한테 전햇더니
곰곰 생각하던 엄마가
제 손을 잡고 길가에 나가 조그만 돌맹이 10개를
주워 제손에 쥐어 줬었죠
참 기억에 남는게
그걸 들고간 제 손을 바라보던
남자 담임샘의 떨리던 눈빛,
갈곳잃은 눈동자...ㅎㅎㅎ
아버지 사업 실패로… 아파트 생활과 가정부고 쓰던 생활에서, 친척집 살이로 …
학교 준비물 필요하단 말도 못 꺼내고 아침에 혼자 목 놓아 울었던 기억이…
정규 교육과정 국졸이 전부.
국졸 후 바로 취업(? 그 땐 어려도 그냥 취업) 모 회사 구내식당 창고 개조 방에서 생활…
야학이라 무료로 검정고시과정 알려주시던 멋진 대학생 선생님들께 배워, 중고과정 검정고시, 대학과정은 사이버대…
직장(?)생활 안 한 기간이 몇년 안되니, 삶의 약 70% 이상을 돈버는데 썼네요. 많이 벌진 못하지만…
나름… 열심히 산거 갔습니다만 아쉬운게 꽤 있네요…
내 나이, 이제 50대 중반이군요…
참,,, 속상했던건, ㅂ랄 친구라 믿었던 친구들에게 느꼈던 그 감정... 눈초리...은근히 피하는 모습...
지금도 잊지 못하죠,,, 이젠 다시 모임도 하고있고, 연락도 하곤 있지만,
만약,,, 그 친구들이 어려워져서, 내게 부탁을 한다면,,,, 그 순간 그들은 친구가 아니라 그냥 남 입니다.
오늘, 그동안 준비했던, 특허 출원을 위해 변리사에 연락해서 물어보니...
특허 출원 가능성이 상당히 놓으니, 가능하면 얼른 진행하는게 낳을듯하다고 하여,,
계약금?..입금하고, 도면도 보냈네요... 만약 특허가 출원된다면,
제일 배 아파할 사람들이 지금 제가 친구라고 믿고있던 놈들 아닐까 합니다...
저는 세상 헛 살았어요..
그들이 원래 그런거를 늦게 안거죠.
님께서 잘못 사신거 아녜요.
좋은 사람들 만나실겁니다.
왠 빈댓글이죠?
어이없군요.
너무 배고프면 별생각이 다나는데 그래도 어린나이에 자존심이 있어서 티 안나게 살려고 노력많이 했어요.
다만 일을 해줘도 돈을 입금하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는 인간들 때문에 한계까지 몰렸었는데..
한번은 며칠 굶다가 날도 춥고 이런식이면 진짜 죽겠더라구요.
그러다가 봉지를 가게 가져가면 50원 주는 제도가 생각나서
버려진 봉지를 몇 개 주워서 카운터에 내밀면서 제일 싼 컵라면 하나를 들고 이걸로 결제되냐고 했는데
하필 젊은 아가씨가 가게를 보고 있어서.. 비닐 내미는 것만으로도 창피했는데 혐오스럽게 쳐다보면서 안받더군요.
그렇게 공짜나 마찬가지로 얻은 게 뜨거운 물 부어먹는 라볶이였는데
처음 먹어봐서 물을 조금 붓고 따라 내버려야되는걸 모르고 물이 한강이 된 상태로 먹었어요.
완전 맹물맛이었는데 빈속이라 토할것 같은 느낌?이었네요.
가끔 생각나는 젊을때 장면입니다.
지금은 돈도 많이 벌어서 애들한테도 아낌없이 쓰니까 행복해요.
연립지하실이었는데 큰일을 보려면 2층 주인집의 벨을 눌러야 했어요.
부모님은 멀리 떨어진 상가화장실을 쓰셨는데 어린 저는 거기까지 참고 가지 못하니까요.
남의집 현관에 서서 화장실을 쓰러왔다고 말해야 했던게 어린 마음에도 너무 괴롭고 창피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런 지하실에서 6년을 살다가 화장실이 있는 집으로 이사했을땐 너무 기뻐서 청소는 매번 제가 했어요.
수도 전기 가스 다 끊겨서 지하철역에서 살다시피했고요
모두 과거 이야기니 지금은 넉넉하고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토사물 먹으려던걸 어떤 식당 아주머니가 막고 대리고 있으시다가 노가다일끝난 아버지에게 저를 안겨주셨는데
그날이 저희 아버지 처음으로 우시는걸 본 날 입니다.
그전에도 단칸방에 살았지만 이건 아예 살 곳이 없어진지라...씻을 곳이 없어 학교 화장실에서 세수했습니다. 남이 볼까 봐 너무 창피했죠.
알바해서 100만원을 모은 후 창문도 없는 방을 얻었습니다.
그놈의 재개발 때문에 집주인 아들이 딱지받으려고 임차인들 다 내쫗은건데 막노동하시던 아버지는 그때 공사장에서 떨어져 병원에서 입원하셨죠.
한달 친구집에서 살던중 학교 마치고 어머니 손에 끌려 외할머니집. 정확히는 외삼촌집에서 몇달 살았습니다.
진짜로 학교에서 수도물로 배채워도 봤네요.
그뒤로도 부모님 인생은 잘 안풀렸지만 저는 운이 좋아 나름 잘 지내네요.
쓰레기더미 옆에서 잔적도 있고 그러네요.
지금은 뭐 밥벌어먹고 살고 있어서 행복하죠
지금은 그곳이 아파트촌이 되었네요.
그때를 기억하며 악착같이 살아서 지금은 풍요롭게,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음 다 부도 맞고 수입은 없고..
어머니께서 이모들께 돈 빌려서 아버지 매달 나가는 대출금 등등 갚고..
아버지께서는 힘드셔서 술 드시고 들어오셔서 우시고..
전 학교 2학년 1학기 마치고 휴학..
동생도 학교 서울 상위권 갈 점수 낮춰서 지방 공대 가고..
뭐 저도 공대였지만..
동생 대학 등록금 기한 마지막날 겨우 겨우 어머니께서 작은 이모께 현금 빌려서 저보고 아르바이트 가기전에 동생 학교 가서 대신 내주고 오라고..
그러다가 군대 입대하고 나서 도저히 눈에 밟혀서 상병때 하사 지원해서 8년 군대 있다가 전역하고..
아이엠에프 당시 진짜 건설사들 부도 날때마다 아버지는 전화 붙들고 집에는 딱지 붙고… 겨우 겨우 딱지 붙던거 어떻게든 막고 하이고…
마지막 줄이 어때서요.
저는 좋구먼
모공에서 꿀빤 세대라는 글만 10여번 봤습니다.
PS에 적극 공감합니다.
온집안을 뒤져 430원인가 찿았는데 라면하나 살돈이 안되더라구요
도저히 편의점은 못가겟고 조금 떨어진곳에 어르신이 새벽까지 하는 가게 앞에서 이 돈으로 ㅇㅅㅌㅁ 하나만 주시면 안되겟냐고 부탁해볼까....하면서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서성거렸던 기억이 납니다
어떻게든 먹고는 살았던 것 같습니다...
몇끼 굶고 나니까 누가 밥 좀 사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는데, 친구한테 밥사달라는 말이 정말 안나오더라구요.
집에 지갑을 두고 왔던거라면 쉽게 했을 말인데, 돈이 없어서 하는 말은 구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속도 모르는 친구들은 부자집 아들이 왜 돈을 안쓰냐고 밥좀 사라고 하고..참
지금 와이프와 순대국을 하나만 시켜 찌개마냥 둘이 퍼 먹었던 기억도 있네요.
정말 돈이 없으면 구걸이 되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 요청하기가 힘들다는 걸 깨달았었습니다.
제발 돈 걱정 좀 안해봤으면 하며 20대를 정신없이 보낸 결과,
지금은 종부세 내며 살고 있습니다.
IMF 꿀빤 세대..라고 말하는 분 있으면 진심으로 그 양반 따귀도 때릴 수 있습니다.
근데 그 전에 초등학교때까지는 아버지 가게에서 생활했죠....구석 아주 작은 골방에 있다가 가게 끝나고 나면
가게 바닥에 호루(?) 파란색 비닐같은거 깔고 그 위에 이불 올려놓고 잤죠~
근데 그 기억때문인지 부모님은 투자도 안하시고 돈도 안빌려주시고 보증도 안서시고 해서
그 담부터는 괜찬았던거 같아요
그래도 김대중 대통령 때 아버지 사업이 조금씩 살아나면서 나아지더니 노무현 대통령 때 진짜 일이 잘 풀려서 빚도 갚고 집도 사고 그랬었죠
근데 이명박 XX때 힘들어지고 박근혜 때 망할 뻔하다가 문통 때 다시 잘 풀려서 빚갚고 그랬네요
전 지금도 가난을 이기게 해준 김대중 대통령을 가장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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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김에, 그리고 옛날 생각에
그냥 적었던 글인데
많은 분들이 공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모두 어려운 시절, 고생하셨습니다
제 나이 52살.
지금이 인생의 화양연화입니다.
가난을 극복하는데 20년 중간계층으로 이동하는데 5년 정도 걸린듯 합니다.
뒷 돌아본 청소년기의 나와
청년기의 힘들어하던 날 본다면
위로해 주고 싶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지금 이 모든 걸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한 미래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부시게
당신은 그럴자격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