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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이나 극심한 갈등 상황에서 '당사자(當事者) 주의' 라는 입장이 있습니다.
일부 장애인 이슈나 소비자 문제에서도 비슷한 관점이 있는데,
그래서 영어로 이를 "컨슈머리즘 Consumerism" 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직접 경험을 한 당사자만 해당 이슈에 목소리를 높일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실제 '장애인 관련 이슈'는 당사자가 아니면 설명하기 힘든 측면이 있긴 합니다)
쉽게 말해 "피해자가 직접 소송의 중심"에 서야 하고 효과적이라는 겁니다.
예전 중세시대 고을의 수령 앞에 서 억울함을 호소한 콩쥐나 심청의 아비를 떠올리면 간단한데,
당시의 판사격인 사또가 질문하면, 변호사가 중간에 나서 변호하는 게 아닌
피해자와 가해자로 추정되는 사람이 직접 스스로의 입장을 피력하는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갈등에 있어 '당사자주의'는 언뜻 합리적이고 최선의 방법으로 보이지만,
결국 사회의 진보를 막고 갈등의 근본적 해결을 저해하는 전근대적인 사건해결 방식인 경우가 많다
가끔 현대사회에서도 '변호사'를 불신하는 일부 당사자가 법정에서 본인을 변호하기도 합니다.
그게 멋지다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은 굉장히 "위험하고 퇴행적인 모습" 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약자와 피해자는 본능적으로 "본인"의 억울함만을 푸는 데 집중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본인의 억울함이 운 좋게 풀리면 행복한거고, 그게 안풀리면 '한'이 남는 그런 시스템입니다.
우리가 검사라는 현대적인 형사소송법 제도를 도입해서 기소를 전담하게 하고
판사라는 제도를 마련해 판결을 전담하게 한 이유는
큰 틀에서 보자면 "객관적 지식의 공유를 통한 어리석은 행동의 반복을 막기 위함"이란 현대성에 밑바탕을 깔고 있습니다.
철저하게 사건을 객관화 시키고, 동일한 사례의 유형화를 통해
개개인의 특수성이 개입할 수 밖에 없는 '사건' 하나하나에 보편적 의미를 부여해
사회가 함께 진보하기 위함입니다.
그 바탕에 '인권'이라는 '보편적인 행복추구권'이 깔린 것 또한 물론이고요.
현대사회과 이전의 왕조시대와 결정적으로 차별성을 부여받는 지점이 되기도 하고
인간사회가 '진보'했다는 평가를 받는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약자인 피해자는 될 수 있으면 소송의 과정에서 전면에 부각되면 안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2. 조중동의 '경험주의'와 이용수 씨의 '당사자주의'
저는 지난 몇 주간, 조금 솔직하게 말하면, 윤미향 당선자 보다는 이용수 할머님을 이해하려고
무척이나 노력해 왔습니다. 왜 그분이 저리 불만이신지, 어떤 배경이 있는지 이해해보려고 한거죠.
비겁해 보일 수도 있는 그 이유를 설명드리자면,
첫째는, 운동조직내의 비밀주의가 분명 있긴 했습니다.
둘째는, 운동화시켜내는 과정에서 정파성이 과도하게 개입된 측면이 있었고,
셋째는, 이로인해 NGO 내부에 반대세력이 사라짐으로써 고질적인 회계문제가 분명히 있다고 봤거든요
윤미향 당선자가 완벽한 인간이 아닌 이상에야
당연히 약점도 있었고, 운영상의 실수도 있었겠고, 또한 반대파도 있었을테죠.
그러나 정치인으로 변신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그런 반대파의 공격에 대해 국민이 납득할만한 "설명자료"를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일종의 '회계부문'의 투명성과 객관성 확보에 대한 부문입니다.
분명 미진한 대목이 엿보였고, 그래서 이 사태가 더 안타깝기도 합니다.
인권운동가를 자처한 이용수 씨의 주장 "한일 역사갈등 문제는 직접 피해자인 내가 용서해야 결국 풀리는 일"
그런데, 어제 기자회견을 다시 보고는 생각이 정반대로 바뀌게 되네요.
이용수 여성인권운동가의 문제점이 더 커보이게 되고,
절묘하게 조중동과 일본의 철학과 맞물리는 대목이 떠올라서 다시금 생각을 가다듬어 보게 됐습니다.
이용수 씨의 주장은 전형적인 '당사자주의'입니다. 요약하면 이렇게 보입니다.
위안부 사건이라는 역사의 피해자가 엄연히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는데,
어떻게 윤미향이라는 제 3자가 이 사건을 대표해서 국회로 들어가고, 일본과의 갈등 상황을 풀 수가 있겠는가?
위안부 문제의 핵심당사자는 바로 '이용수'를 비롯한 생존한 피해자들이어야 한다.
그리고, 일본의 사과를 받더라도 우리가 대표로 받아야 하고,
보상과 위로금을 받더라도 살아남은 우리가 받아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윤미향은 기껏, 우리를 돕는 서포터에 지나지 않으니, 여러분 윤미향을 믿지 말고, 나 이용수를 믿어주세요
라는, 사실상의 정치적 입장 표명인 것입니다.
이런 당사자 주의는 절묘하게 조중동의 '경험주의'와 맞물려보이더군요.
경험주의란 "직접 체험한 것만을 믿는다"라는 팩트 기반의 철학을 얘기입니다.
보편적 합리성에 기반을 한 이성주의와 궤를 완전히 달리하는데,
기자가 직접 취재한 내용은 '진리'에 가깝기 때문에, 독자분들은 복잡하게 고민하지 말고, 언론의 보도를 믿으라라는 주장이기도 합니다.
일제시대에 탄생한 '조중동' (중은 일제시대는 아니지만)
위안부 문제에 대해 꿋꿋하게 이 같은 '경험주의' 원칙을 견지해 왔습니다.
피해자가 있었다는 사실은 인정 OK, 그건 팩트
그런데 그 피해가 누구 때문인지 알아보니, 일제도 잘못이 있고, 나라가 망한 조선도 잘못이 있고,
딸자식 하나 보호하지 못한 애비애미도 잘못이 있고,
일본이 전쟁에 나서야 했던 세계사적인 흐름도 잘못이 있고,
협상을 제대로 못한 한국 정부의 책임도 분명히 있고....
여튼, 시대에 잘못이 있어 보이는 데 책임소재 분명히 따지기는 복잡하고....
이런 국가급 이상의 의사결정의 문제는 '경험주의'로는 풀지 못할 수 밖에 없고,
조중동은 비겁하게 역사의 벽 앞에서 판단을 멈추고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수십년이 지나 이용수 씨의 주장에 갑자기 '열광'하는 이유는,
위안부 피해자가 제대로된 한을 풀지 못하고 게다가 한일관계가 경색된 이유를 알아보니,
세상에나....!! 저런 종북주의 운동권 집단들이 똘똘 뭉쳐서 일본정부의 선의에 의한 '현금'과 '보상' 제안을 거절하고
심지어 우리 국민들이 성금을 걷어서 준 돈을 가지고 위안부를 지원하지 않고,
그 돈으로 '반일운동'을 했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나선 겁니다.
"여기 좀 보시오 국민 여러분, 일본제국은 위안부 여성들을 불과 5년 밖에 괴롭하지 않았지만,
위안부 시민단체라는 작자들이 무려 30년 동안 우리 할머님들의 속을 썪여 왔답니다.
돈도 안주고 밥도 안주고 쉼터도 빼앗았답니다....
이거는 팩틉니다. 왜냐면, 이용수 할머니와 무궁화회 할머니들의 증언이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팩트를 믿으셔야 합니다
위안부 문제는 일본도 문제지만, 실제는 운동권 조직의 문제가 더 큽니다~~~여러분!!!"
3. 역사문제에서 '당사자주의'를 과감하게 발로 차야 하는 이유
앞에서 쓴 내용만으로 충분히 이해가 가시겠지만, 다시 한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위안부 문제는 비단 살아남은자들의 합리적 '보상'을 위한 문제가 아닌 수준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용수 씨의 생떼에 대해서 합리적 비판을 본능적으로 감추는 이유는
그가 살아온 고통어린 체험에 대한 공감대가 어느정도는 공유가 됐기 때문이지, 별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가 굳이 우리 얼굴에 침 뱉는 행동을 할 이슈가 없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우리가 분명하게 깨달아야 하는 대목은 철지난 '당사자주의'에 대한 폐기에 대한 것으로 믿습니다.
위안부 문제에서 위안부 출신은 뒤로 빠져라, 라는 게 아닌
한일 역사 문제에서 피해자는 당신 하나가 아니다, 라고 표현하는게 더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일 역사갈등과 시민운동은 이용수 씨의 적절한 피해보상을 위한 운동이 아니었고
이미 1940년대 가슴에 한을 안고 세상을 떠나야 했던 수많은 전쟁피해자들과
1910년부터 45년까지 나라 잃고 독립운동 와중에 억울하게 피해를 본 수많은 독립운동가들과 그 후손들의
정당한 역사평가와 민족적 자부심, 그리고 독립국으로서의 역사회복을 위한 것이지
일개 개인의 피해보상금을 산정하기 위한 운동이 아니었다는 거죠
70년이 넘는 시간이 흐른 위안부 문제는 단순히 피해자의 보상 문제가 아닌
인류의 진보를 위한 보편적인 인권과 전쟁의 문제를 포괄한 '글로벌 시민운동'으로 진화했다.
이 시기의 '당사자 주의'를 내세운 이용수 씨의 주장은 말 그대로 역사의 퇴행이다
피해자의 입장을 고려해야 함은 물론이지만,
피해자의 목소리에 역사가 휘둘려서도 곤란합니다.
만일,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과 전쟁"을 통한 복수를 요청한다면, 우리는 그 요구를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것은 분명 아닐 겁니다.
피해자분들의 분노를 받아 안아 역사의 교훈으로 삼기 위한 평화운동이지, 우리가 일본에 무력으로 복수를 하기 위한 운동은 아니니까요
물론, 봉준호 감독이 인용한 마틴 스콜세지의 말대로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긴 합니다.
하지만 그 것은 내러티브 상에서나 시청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단계에나 적용되는 말이지
실제 현실정치에서 가장 정치적인 것은 '역사'를 인식한 깨어있는 시민들의 연대라고 해야겠죠.
이용수 씨의 '당사자 주의'는 우리 사회가 70년 동안 발전시킨 현대성과 국민국가의 철학을 배신하는
일종의 역사의 퇴행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그런 퇴행을 부추기는 언론과 검찰도 문제이고, 일부 정치집단도 퇴행적입니다.
우리가 나이를 많이 먹는 다는 것이 반드시 '현명해 진다'는 것이 아님을 깨달은 지도 불과 십수년인 듯 합니다.
이용수 씨의 주장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 분의 행동이 결국은 퇴행적 역사의 한 예가 된다고 생각하니 안타깝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한, 머 그런 밤입니다.
PS: 또한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조금은 맥락에서 벗어난 일일 수도 있지만 결국은 "투명성"과 "객관성"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고통스럽지만 시민단체도 이런 투명성과 객관성을 높이려는 노력을 통해서
역사의 문제가 내부의 적들에 의해서 다시 공격받는 가능성을 줄이려는 노력을 함께 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고인이 되신분들도 많고 고인들께서 저분을 대표로 지목한것도 아닌데 말이죠
그리고 고인들께서 생존하셨을 당시의 여럿 언론에서의 말씀만 봐도 철저하게 일본의 사죄를 바라셨는데..
마치 할머니께서 용서하면 다 끝난다는 뉘앙스가 되버렸습니다
굉장히 우려스럽고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결국은 현실적 제약 안에서 살아가니까요. 존경도 받고 싶고, 생의 의미도 찾고 싶겠죠.
그래서 사람은 오래 살아갈 수록 '보수적'으로 변하나 봅니다.
본인의 생존에 대한 정당성을 찾으려는 욕망이 시간이 갈수록 강해지나 봅니다....안타까우면서도 이해가 되니 더 안타깝네요.
우리가 위안부 문제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이 역사가 다시는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작금의 검찰-언론-정치의 행태는 너무나도 정치적이라는 겁니다.
역사와 외교의 문제를 왜 정치적으로 접근하는지 저는 그 의도가 매우 궁금합니다.
"역사문제에서 당사자주의를 버릴 수 있는" 경우는 모든 역사적 피해자를 통합적으로 다루는 어떠한 단체에 대해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멀쩡히 문제의 '당사자 때문에 당사자를 위해서 설립된 단체'에서 '당사자주의'를 버려야한다 라는 건 애초에 단체의 설립 이유자체를 부정하는 일이 된다는 생각밖에 안들거든요.
저는 근본적으로 '당사자 때문에 당사자를 위해 설립된 단체'에서 '당사자주의'를 벗어난다는건 말도안되는 일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글에서도, 3항이 나오기 전까지는, '위안부 문제와 그에 관련된 단체'라는 명확한 당사자 대상의 단체와 그 당사자간의 이야기에서 3항에서는 갑자기 '역사문제'라는 포괄적이고 당사자가 모호한 개념으로 이야기가 바뀌었습니다.
한일 역사문제에서 피해자는 당신만이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있겠으나, 위안부 피해 당사자와 위안부 문제 때문에 설립된 단체 사이에는 '당사자'에서 벗어날 수가 없죠.
하지만 당사자가 소송의 중심에 선다고 문제가 해결이 될까요?
해결이 됐다면 진즉에 됐었어야한다고 봅니다. 당사자의 고통의 목소리가 더 높았을 때 일본정부는 왜 이를 무시하고 눈을 감았는지 한번쯤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이미 소송이 30년째 진행중인 사건에서 갑자기, 당사자 중 1명이, 내가 다 용서하니 소송은 없던 일로 하자, 라고 주장하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보시나요?
그렇지 않죠. 제가 말씀드리는 부분은 거시적인 대목의 '당사자 주의'에 대한 반대입니다.
이용수 씨의 불만도 당연히 있을테죠. 소송지 지겹기도 하고, 빨리 피해보상 받고 소송을 마무리 하고 싶은 마음도 있을 테지요. 그러나 이 문제는 이미 국가와 정부의 존재근거를 다투고 싸우는 큰 소송이 됐습니다. 그리고 이용수 씨가 모든 피해자를 대표하는 존재도 아니고요. 만약 그렇다면, 이용수 씨가 모든 피해자의 의견을 모아서 공증이라도 받아서 와야 한다고 봅니다.
요는 이렇습니다. 당사자가 당연히 배제되면 곤란하다. 하지만, 당사자주의는 배격되는게 맞다. 이용수 씨의 불만은 한국정부와 변호인이 적절하게 문제를 이해하고 풀어주는 것도 좋겠다. 정도 입니다.
일단 저는 할머니의 기자회견등의 내용이 단순하게 '내가 다 용서하니 소송은 없던일로 하자' 라고 읽히지는 않았습니다.
애초에 이용수 할머니가 이야기하는 내용은 대부분 '단체 그 자체와 그 소속 사람'과 당사자인 할머니 간의 이야기이지, 국가와 국가 사이의 소송수준이 아니잖아요.
지금의 할머니가 주로 제기한 문제(당선인 및 관련 단체와의 문제)는 '거시적인 대목의 당사자주의'가 적용되는 수준이 아니라는거죠. 근본적으로는 당사자와 당사자를 위한 단체 간의 문제인데요.
게다가 할머니와 당선인과 관련 단체 사이의 문제를 왜 한국정부와 변호인이 해결해줘야하는지도 이해가 안되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피해자 문제 해결에 있어서는 근본적으로 당사자의 용서가 기본이 되는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국가와 국가가 싸워서 어떠한 결과를 도출했다고 할 때, 그 결과가 당사자가 받아들이고 용서할 수 없는 결과물이라면 애초에 해결이 되지도 않는 일이잖아요.
'당사자주의'를 빼버린다는 말은 당사자가 만족하지 못하는 결과가 나오더라도 당사자는 받아들이고 용서해야한다는 근본적으로 아이러니한 상황이 되잖습니까.
다만, 개인의 문제를 넘어 사회와 국가, 그리고 역사의 문제를 볼 때는 당사자주의가 유효치 않음을 말씀드린 겁니다. 예를들어 법정에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합의를 하더라도 검사는 구형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법정의 존재 이유 때문에 그렇습니다. 판사는 합의내용을 참작을 하지만 판결에도 주저함이 없죠. 왜냐하면 그게 인류의 발전 때문이기도 하고 현대성의 본질 때문이기도 합니다. 강간범과 피해자가 합의를 해도 검사가 구형을 하고 판사가 벌을 내리는 이유는 사회에 경종을 울리고, 동일 범죄가 줄어들게 하들기 위한 '사회적 합의' 때문에 그렇습니다.
개인의 문제가 역사의 법정 앞에 나왔을 때도 동일한 원리가 작동한다고 믿습니다. 당사자의 피해는 증언을 통해 객관화되고 문서화 과정을 통해 역사의 증언대에 오른 것이지, 개인이 그 문제의 해결을 말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말씀대로 용서하자는 얘기는 아닐 수 있습니다. 본인의 변호사가 맘에 안들었던 거겠죠. 그러니 이제까지의 변호인의 변호는 없던 걸로하고 내가 내 자신을 변호하겠다는 말인 건 분명합니다. 변호인이 나를 팔아 치부했다는 주장도 있긴 합니다. 저도 동의 합니다. 그 문제는 사실관계가 나와야죠. 하지만, 그 관계의 갈등화로 역사의 법정이 후퇴할 수는 없음을 말씀드린 겁니다. 특히 이용수 씨의 당사자주의는 무척이나 위험하고, 사리에 맞지 않음을 지적한 것입니다.
계속 말씀을 들으면서 궁금한 것이, 그 역사의 법정에 나와서 내려진 결론이 피해자가 만족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 결론은 피해자는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인가요? 역사적 사실에 대한 국제적 판단은 반드시 피해자의 주장이 충분히 반영되어 결론내려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몽상적인 수준의 기대일 뿐인데요.
받아들이고 용서하여야만 하는 것이라면, 이 과정이 피해자에게 무슨의미가 있는 것이고, 받아들이지 않고 용서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라면 이것이 '당사자주의'가 아니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할머니가 한 주장을 '범국가적 사안'으로 확대하기만 하는 것도 부적절하다는 말씀을 계속 드리는겁니다.
일단 과연 당선인과 당선인의 단체가 '할머니의 변호인'이었느냐도 논쟁거리가 되겠지만, 할머니는 '그 당선인과 당선인의 단체와의 관계의 갈등'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고, 그 갈등 사안에 대해서는 엄연히 '당사자주의'적인 부분의 내용들이라는 겁니다.
이러한 내용들을 '범사회적 사안'이라는 위치로 임의치환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말이 안맞는 것이죠.
할머니가 제기한 문제중에 '범사회적 사안'에 속하는 내용도 있겠습니다만, 할머니가 제기한 문제가 '총론적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갈등'으로 말할만한 것이 다수라는 생각은 안들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문제들을 '번사회적 사안'으로 굳이 치환하는 것은 왜곡이라는 생각이 자꾸 드는군요.
저는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좋은밤, (아니, 이제 아침이네요.) 되세요.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정의연이 세계적으로 공감을 받았던 이유는 '누구나 공감할만한 피해를 받은 피해자'라는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30년이 지나는 동안 운동은 범진보적인 인권운동으로 진화했지만 여전히 그 중심엔 피해자가 운동의 명분으로 존재하고 있죠. 그 명분의 중요성을 알기에 이용수 할머니의 스탠스에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는게 아닐까 싶어요.
(마틴 스콜세지 부분은...정치적이 아니라 창의적...아니었나요;;)
무척이나 공감이 되고 뭔가 배워가는 느낌이기도 합니다.
감사합니다.
많은 부분에서 공감합니다.
저도 같은 생각이었지만 스스로 명쾌하게 정리가 안되더군요.
기레기들 전부 들어와서 읽고 배워가야 할듯
특히나 피해자가 다수면, "친한 친구가 일베한다"는 분들 종종 나오죠.
몇안되는 친구지간도 그런데, 각자 사정과 이해관계+피해자의 서운함까지 섞여들면 답없죠.
그걸 이끌고 30년을 올수 있는 사람이면 적도 많고, 성격도 깐깐하기도 하죠.
소록도 수녀님들처럼 봉사만해서 되는게 아니라 신념을 가지고 싸워야하니까요.
털면 뭐든지 나온다는 회계문제와 함께, "피해자를 이용해서 xx한다"는 프레임도 아무데나 걸면 만능이죠.
"진심으로" 할머니들을 위해 분노했던 분들도 내심으론 그게 쉽지않다는걸 알기에
쉽사리 안믿었던것이라 봅니다. 그런데 우리에겐 정확한 판독기가 있엉.............ㅎㅎ
덕분에 많은 생각들 정리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