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건 다 좋다 치고......ㅎㅎㅎㅎㅎ
맨날 전쟁하면 수십만에...포로 수십만에......
당시 인구나 평균수명이나....출생율을 보면 그렇게 전쟁해서 나라가 존재할수가 없는데 말이죠....
그래서 항상 숫자 마지막에 "0"을 뺴고 계산하면 얼추 이해가 되더군요....
10만병 출병이면 1만.
100만명이면 10만.
100만명이 공격할려면 후속 병참부대원들이 곱절로 필요한데....어디서 데려올건지....
전국민이 경제활동 올스톱하고 전쟁하러 갈수는 없을텐데 말이죠.
아무리 이렇게 저렇게 계산해도 말이 안되더군요....ㄷㄷㄷㄷㄷㄷ
이율곡의 10만양병설도 당시로는 왜 엄청나게 충격파를 던졌는지 이해가 되고....
임진왜란 당시 탄금대에서 전멸한 신립의 8천의 기병대가 당시 조선의 최정예 기간병이라는게 이해가 되더군요.
즉 주력기갑사단이 무너진것이죠.
그리곤 속절없이 조선이 밀려버리는....
일본은 그 전에 전국시대였어요. 전쟁으로 국가 경제가 돌아가는 시스템이라 통일이후 남아도는 병력을 조선에 투입한 것이구요.
한국전쟁도 미,소간 2차세계 대전이후 남아도는 전쟁몰자를 해소하기 위한 대리전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당시 일본은 높은 농업생산력(조선보다 여건이 좋습니다)+세계 클래스의 구리 생산/수출국이었습니다. 이미 경제력에선 조선보다 월등했죠. 오랜 전국시대를 거쳤다 해도, 영주와 그들의 군대/성이 파괴될 뿐 농토와 농민들이 파괴되는 것은 아니기도 했고요(세금과 부역으로 시달렸지만요). 그런 경제력을 바탕으로 말 그대로 상비군만 30만을 거느릴 수 있으니, 군대도 세계 클래스였습니다.
우선 광해군의 1만 파병과 율곡의 10만의 대비는 상응하지 않는 면이 있습니다. 전자는 국경 밖으로 파병하는 것이기에 후자보다 보급에 많은 부담이 추가됩니다. 실제로 보급문제로 제대로 먹지 못하고 탈진할 정도라, 행군속도가 느리다고 갈구러 온 명나라 장수가 실상을 보고 식량을 조금(자기들도 많이 남는 게 아니니...) 나눠줄 정도였습니다. 광해군은 일찌감치 후금이 만주를 장악하고 정착할 거라 판단하여 적극적으로 싸울 생각이 없었다 이전의 문제입니다.
율곡의 10만 양병은 (주로 율곡을 부정적으로 보는 진영에서)사실 자체를 의문시하는 견해도 있지만, 율곡의 일관된 군제 개혁 건의를 볼 때 있었던 게 당연하다고 봅니다만, "10만"에서 간과해선 안될 측면이 있습니다. 일단 그 10만은 상비군은 아니며 이들 중에서 교대로 복무한다는 겁니다. 지방에서 상경해서 교대근무할 경우에는 2개월씩 8교대까지 나뉩니다. 국경지대 유병留兵은 주기가 길겠지만요... 결국 10만은 현대적인 의미로 보면 그냥 현역이 아닌 현역+동원예비군(중에서도 동원지정자?)쯤이 되겠습니다.
성종 때 군액(갑사 및 정병)이 14만이었습니다. 별다른 자원이 없고 농업 위주의 조선 정도의 사이즈에서도 최대 10만까지 동원할 태세는 그다지 무리는 아니었을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수취체제의 결함으로 민생이 파탄나고→정부재정의 고갈→군제의 유명무실화 때문에 당연히 할 만한 것도 못하게 되었다는 선조 당대의 현실이겠죠.
세종대왕때 갑사가 3천명 정도였는데 그때도 호조에서 갑사에게 지급할 토지가 부족하다고 하는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ㅇㅅㅇ
갑사는 상비군이었지만 숫자를 늘리기 위해 상번 하번으로 교대로 복무하여 당대에도 질이 낮아진다는 비판이 있었습니다.
세종때 3천이었던 갑사는 세조때 3만여명으로 늘어나는데 이미 제대로 봉토나 녹을 지급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질적 저하가 가속화됩니다.
갑사의 병기류는 스스로 준비해야 했기 때문에 경제력이 중요했는데, 사회유력자는 군복무를 기피했기 때문에 경제력이 없는 사람들이 갑사가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갑옷에는 종이, 가죽, 철갑 등을 보태는데, 철갑이 제일 좋지만 경제적인 문제로 종이만 덧대는 병사들이 많았습니다.
갑사는 기마와 복마로 말2필을 준비해야 했는데. 조선초와 비교하여 조선에 존재하는 말은 1/3 조차 안되어서 말의 가치가 너무 뛰어올라버린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갑사들은 군장점검이 있는 날이면 서로 말을 돌려썼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 밖에 대립 문제도 많았고, 아니면 병역기피를 위해 산으로 사라지거나 승려가 되는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
이는 소수 공신들이나 왕족 양반들의 토지 점유 때문에 부족한 세수를 일반 국민들에게 떼우느라 발생한 문제로
이에 대한 개혁이 시급한 상황이었습니다.
이애 대한 개혁을 주장한 사람중 유명한 사람이 조광조 이이 등등 있는데.
모조리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임진란 때인 16세기 후반은 일본 은광의 시대 아닌가요?
구리 동광은 17세기 중반 이후고요.
율곡의 후배들이 자신들의 정통성을 위해 거짓까지 동원하면서 띄울려고 했던 것이 문제입니다.
냉정하고 객관적인 평가가 필요합니다.
율곡이 10만양병설을 주장하지 않았다고 해서 율곡의 업적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일반에게 덜 알려진 율곡의 업적으로 조제보합론이 있습니다.
동인, 서인 당쟁을 군자와 군자간의 권력투쟁으로 본 것입니다.
군자와 소인 간의 당쟁만을 본 구양수, 주자를 뛰어 넘어 군자 간에도 의견차이가 있어 각각 당을 만들어
싸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쉬운 것은 이 이론이 발전하지 못한 것입니다.
저도 애초에 제기하신 의문에 상응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럼 율곡이 말한 10만은 동원대상자의 규모라면(상비병력은 2만 좀 넘겠죠), 조선의 여건에선 10만 규모의병력을 굴리는 게 불가능했다고 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건 평시에 장기지속이 가능한 운용을 전제하는 거고, 비상시에는 얘기가 달라질 수도 있겠죠. 임란 때는 17만까지 굴려본 적도 있긴 했습니다.
거기에 모일자리는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방에서 대여한 버스로 올라온 머릿수도 정확히 모르신다면서 어떻게 다양한 교통수단, 다양한 시간대에 온 모든 사람의 인원을 예단하시는지?
그리고 말씀하신 지하철 물량도 어디 소스인데요? 신의한수? SBS? KBS? 아니면 마봉춘 변신전인 엠빙신? JTBC? 걔네들 검찰개혁 신나게 까내리던 미디어들인데요? 이해당사자에요. 딴건 몰라도 이해당사자인데 그 자료를 들고 오시진 않았을 거고. 도로교통공사 내부자료라도 들고 계신 건가요?
아이쿠 그나저나 제가 올리자마자 십분도 안 돼서 댓글들이 부들부들... 직업에 너무나 충실들 하시네요. 다섯 시까지는 근무하시나보네요.
그래서 배고파요님은 서초동에 모였던 사람이 얼마 정도라고 생각하세요? 대략적으로 말이에요.
참고로 충청남도 인구가 210만 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촛불을 모독적인 시선으로 본다는 걸 알겠네요. 정치적인 이유요? 이봐요. 그럴거면 1차부터 인간폭발이었겠죠. 근데 폭발한 건 가택수사와 한식냠냠부터잖아요? 왜. 검찰이 한식먹으면 민주당 지지자 늘어나는 겁니까? 그게 아니라 저런 식의 수사가 잘못됐다 생각해서 갔기에, 도덕적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간거지 정치적 집회 아니거든요? 그리 생각하는 건 자검기베기들이나 그렇죠.
그리고 전 태극기모독부대만큼이나 주최측을 믿는다니까요? 헌금통 돌리는 놈들도 믿는데 저라고 안 믿겠어요~?
국정농단 촛불집회 이후 최대 인파 모였다 (2019.09.29/뉴스데스크/MBC) (유튜브 영상)
당일 뉴스 영상을 토대로 만들어봤습니다. 이것도 최대한 후하게 쳐준거에요. 곳곳에 앉아있는 사람이 굉장히 많았거든요. 제 생각에는 실제로는 10만 이하로 추정됩니다. 아니 10만도 엄청 많은거에요...
아침에 왔다 돌아간 사람이 몇이든 절대로 10배도 넘게 차이나진 않죠.
그럼 재반박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일단 장소부터 틀렸네요. 제가 아래쪽부터 십자로까지 걸어 갔는데요. 왼쪽날개도 대법원까지 있었구요. 오른쪽 날개도 교대역 십자로까지 사람들이 계속 몰렸었죠. 아래쪽도 축제가 있긴 했는데,
아... 걸렸다. 잠시후
저는 영상에 나와있는 증거를 토대로 계산한 겁니다. 님의 주장의 근거도 제시해주세요.
그리고 저 16만이라는 사람이 숫자도 움직일 수 없이 꽉 채워서 계산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아직도 인정을 안하시는데... 예술의전당 있는 곳까지 꽉 채워도, 주최측이 주장한 수의 반의 반의 반도 못 미칩니다.
전한시대 과세를 위해 처음 인구조사를 하는데 6500만 정도 집계됩니다.
-과세를 위해 집계된 거라 실제 인구보다 적게 잡혔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
그 후 한동안 집계가 없다가 원에서 하는데 비슷한 수가 집계되죠.
근데 남송이 건국한 후 원통일까지 50년간 전쟁을 했던 걸 감안하면
송에서는 1억에 육박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명초반엔 8000만 청 초반엔 1억을 돌파합니다.
워낙 논농사가 인구부양력이 좋은데다 황사로 하북지방은 늘 비옥해서 인구 수가
이미 전한시대부터 후덜덜했고
강남 개발후엔 이모작이란 치트키까지 나오지요.
쌀농사 수율이 밀하고 비교하기 민망할 정도로 좋아서 조선만해도 천만을 훌쩍 넘겼다죠.
서양사 보다보면 잘해봐야 만명이 투닥(?)거리는걸 보다보면 중국의 십만 동원이 구라처럼 느껴질만도 한데
이미 농사에서부터 넘사벽이라...
과장은 있을지 몰라도 0 하나 뗄 정도는 아니었을겁니다.
다만 삼국지의 백만 단위는... ㅋㅋㅋ 그냥 소설인걸로.
일본의 전국시대 평균수명이 32세입니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는 훨씬더 옛날이니 이와 비슷하거나 낮았을수도 있을겁니다.
하지만 사마천의 사기나 기타 자료들의 전쟁기록을 보면 납득이 불가능한게 한두개 아닙니다.
한예로 7만명의 포로를 흉노와 싸워서 잡아왔다라는 기록도 나옵니다.
7만명? 그거 어떻게 데려오고....어떻게 먹이고 데려올지....식량은....
그것도 만리장성 밖 초원에서 말이죠....
그런데 7천이면 어느정도 이해가 간다는 말이죠. 그래서 많은 재야학자들이 "0"을 하나 빼고 계산하면
타당하다 라고 말하는겁니다.
말씀하신 전한시대 6천5백만이라는 숫자가 실제한다고 쳐도 결국 그 인구가 서로 치고박고 죽이는 춘추전국시대로 들어가고 삼국시대로 넘어가면 대체 얼마나 살아 남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습니다.
즉 그들의 기록으로 봐도 앞뒤가 안맞다는 뜻입니다.
과세를 위한 기록은 소설과 다르죠.
행정 지표이고 기록대로 못 걷으면 담당관리는 죽는데요.
실제 중국의 인구는 꽤드라마틱하게 많이 낳고 많이 죽습니다.
송에서 원으로 넘어갈 때 오천만 정도 죽었고
태평천국의 난 때만 해도 그 짧은 기간에 삼천만이 죽었습니다.
현대에 와서만해도 대약진 때........
재야학자들이 뭐라고 하든 서양이든 동양이든
중국이 똥망했던 전국시대 인구조차 2천만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어떻게보면 현대인의 오만이죠. "그 시대에 그게 가능할리가 없어!" 라는거요.
고대문명 외계인설이 나온거랑 비슷한건데 쌀농사의 사기성 때문에 불가능한 숫자도 아니고
당시 백만 단위의 도시가 상하수도 없이 어찌 가능하겠냐며 안믿었는데 그냥 상하수도가 생각보다 잘 되어있어서 라는 경우도 있고요.
과장된 기록을 그대로 믿을 필요는 없겠지만 모든 기록에서 0 한개를 뗄 정도인지는 의문이네요.
모든입증은 자료와 증거로만 가능한데....자료가 너무 부족하니 정확하게 판단하기가 어렵고 아직은 섣부른 판단으로 밖에 안보이네요....즉 아직은 신뢰할수 없는 부분이 전투,전쟁부분의 인력동원 부분이라는 겁니다.
징집 수가 결정되면 징집이 지역별로 배분되고 그렇게 지방 작은 고을까지 할당이 나옵니다.
담당관리는 할당수를 못 채우면 사형이었습니다.
전쟁중 도망가든 어쩌든 일단 모인 사람은 진짜라는 거죠.
보급은 어찌했나 싶겠지만
임진왜란때 명군을 보면 어떻게 하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은자를 싸들고 와서 표국에서 쌀을 사가는 겁니다.
당연히 표국이 없던 조선에선 은자를 쓸곳이 없자 약탈을 하고
이 소식을 들은 만력제는 내탕금으로 10만석을 쏘죠.
그런 자세한 병사동원기록이 안보인다는거....말 몇마디에 수십만이 쉽게 동원되어 북방으로 전쟁하러 갈수 있는것인지....의문이 남는건 어쩔수 없다고 봅니다.
인구 천만명이면 천명중 한명만 징집해도 1만명입니다. 평균 수명이 짧다는 말은 노년층이 적다는 말로 해석 가능해서 징집 가능한 비율을 현대보다 더 높죠. 여기에 당장 나라가 망할 상황인데 뒤를 보고 징집할까요. 오늘날처럼 싸우다가 항복하는 신사적(?)인 시대도 아니죠.
그리고 청나라를 생각해보세요. 그 허허벌판이 아무리 황무지에 정기적(!)으로 짓밟아도 결국 중국 대륙을 정복할 잠재력을 가진 나라입니다. 7만명이 과장이 들어갈지언정 불가능한 숫자가 아니라는게 동아시아 역사의 신비(?)로움이랄지...
그럼 춘추전국시대의 기록들 보면 당시 지속적으로 그렇게 전쟁이 가능할까? 의문이 드는건 사실입니다.
전쟁이야 지속가능하겠죠. 문제는 진짜 그 인원이 매번 전투마다 동원되었느냐는 겁니다.
그 숱한 전투에 말이죠. 그정도 전투가 될려면 거의 상비군 수준으로 들어가 있어야 할텐데.....
그 후속지원과 비용......쌀만 생산 많이 되면 해결이 되는걸까요?
그걸 소비할 사람들과 세력들이 전부 전쟁중인데.....
이런 부분에 대해서 정확하게 나온 자료들이 없어 보입니다.
국가의 모든 역량을 쏟아붓는다는 총력전 개념이 나온건 근대-1차 세계대전입니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밀려서 밀리는데로 백성들이 학살당해 전 국토가 쓸려나가지 않는다면 점령한 땅에서도 농사를 지어야하니 농사는 그대로 진행(?) 됩니다.
전쟁이 분명 국가를 황폐하게는 하지만 전쟁을 못할 정도는 아닙니다.
당장 임진왜란만해도 전라도 곡창지대 하나로 조선은 전쟁을 수행했습니다.
중국의 경제력이나 역량이 인구빨이 얼마나 무섭냐하면 산업혁명으로 대량생산빨로 저렴한 가격 고품질의 면직품으로 경제침략을 하던 영국이 중국을 경제침략할려고 했는데 중국에서 집집마다 수작업으로 뽑아내던 면직물들이 더 저렴하고 품질 좋아서 실패해서 오히려 은이 중국으로 빨려들어가니까 대안(?) 팔던게 아편... 그리고 아편전쟁...
지금 말씀하신....농사는 그대로 진행된다는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습니다.
다 잡혀가고 죽어나가고 피난가고 불타버렸는데 농사는 그대로 진행된다는게.....이해가 되질 않네요.
제가 중국의 당시 문화를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걸까요???
구체적인 자료와 방법및 기록이 없으니 실제 전투에서 그런 병력을 동원했는지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품는다는 기초적인 의구심의 발로 일뿐입니다.
임진왜란은 한중일의 총력전이었습니다. 이 전쟁으로 한반도는 완전 초토화가 되고 왜국은 토요토미 히데요시 사망후 정권이 바뀌죠. 명나라는 청나라에 무너져 버리구요. 당시 동북아 최대 전투이고 지구상 최대 전투라고 현대 기록에 나옵니다. 30만명 이상 동원된 처절한 총력전이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를 지킬수 있었던건 기록에도 나오지만 이순신 장군과 수군이 있었고 그로 인해 전라도의
식량을 배로 경기북부까지 수송이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곽재우 장군이 진주성과 그 경남일대를 지켜냈기 때문에 전라도가 무너지지 않은거죠.
말 그대로 농사는 계속 됩니다. 땅 점령한다고해서 뭔가 당장 나오는게 아니죠. 농경사회이니 땅이 곧 힘이 될려면 농사를 지어야합니다. 힘들어서 황건적이 나올지언정 결국 황건적이 약탈하고 먹을수 있을만큼은 농사를 지었다는 말이 되죠.
그리고 기록에 대한 의심은 당연한겁니다. 다만 모든 숫자에서 0을 하나 떼야할 정도는 아니라는거죠.
역사는 순서 바뀌면 망하는거예요. ^^
진나라 건국까지 보면 5백년 정도입니다..
그리고 조조는 둔전제를 이용하여 세력을 키웠죠..
중국정사에서 어느정도로 표현하나요?
한국사에서는 1차 백만 2,3차 수십만으로 보는거 같은데.
1차가 30만
2차가 1133800명으로 보급은 이 두배 인원이 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원정 총 인원은 350만 정도였죠.
백단위까지 꽤 정확합니다.
3차는 40만이었죠.
이 30개 군의 완편수가 저렇습니다.
맨 앞 1분 부분부터 해당 내용이 나옵니다.
단순히 113만 병력이란 말만 나오는 게 아니라, 이들이 출발하는데만 40일이 걸리고, 선발대와 후발대의 간격이 400km 까지 될 정도의 병력이란 표현이 나온다고 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113만은 보급까지 포함 (실제 전투 병력은 30만 정도로 추정하는 것이지요) 하는 것이 좀 더 타당성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따져도 1차 세계대전 이전으론 역대 최대 병력이 동원된 전투였을 거란 이야기를 합니다.)
저분도 중국 역사서들은 과장이 심하다는 말씀을 중간중간 하십니다. 하지만 살수대첩은 단순히 병력 얼마로 끝난 게 아니라 다른 기록들이 명확해서 좀 더 그럴듯하다는 의견이지요. 게다가 저 글에도 나온 것처럼 100만 대군이 역사에 거의 없을 정도의 대군이라는 것은 그만큼 다른 전쟁들은 규모가 부풀려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겠지요.
10만명을 징집하려면 거의 전국에서 징집해야했을텐데 무슨수로 모았을지...
인솔관료를 파견합니다.
그러면 지방관은 인솔관료가 올 때까지 인원수를 맞춰 징집해 놓고 인솔관료애게 인계합니다.
인계받은 관료는 예정된 집결지까지 해당인원을 데리고 가는 거죠.
지역별로 이런 전달체가 꽤 잘 되어 있었고
징집 담당관은 인원이 모자르거나 집결지에 늦게 도착하면 군령에 따라 처벌 받았기에
-사형 같은 -
꽤나 목숨걸고 하는 일이었습니다.
고대 중앙행정 능력이 그렇게 무능력하지 않습니다.
사람 뿐 아니라 보급품 징발까지 더 하면 더 힘들었겠죠.
게다가 보급품도 미리 모아 놓은게 아니라면 징발해서 가져올테니 이건 사람보다 더 느리게 움직이겠죠.
도로체계나 대규모 숙박시설 숙영자등이 잘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늘 조선에서 중국에 사신으로 가면 마차 두대가 나란히 달려도 닿지 않는 길이
고을마다 이어져 있다는 감탄이 빠지지 않죠.
그리고 이런 수상 육상로를 바탕으로 운송을 대행하는 표국들이 전문적으로 운송업을 했습니다.
https://www.hankyung.com/international/article/201912068363Y
고대를 너무 무시하시는것 같으시네요. 중국 사례는 아니지만 로마는 사치품도 아닌걸 이렇게 가져올 정도입니다.
당시 육로만 있던것도 아니고요. 현대 자동차에 비할건 아니지만 불가능한것도 사례가 없는것도 아니죠.
사람을 하루종일 굴려봐야 40km정도가 한계일겁니다. 중국 크기가 천단위로 움직이는데 이말은 하루하루 행군급으로 강행군해도 몇십일은 필요하단겁니다. 실제론 산지나 강처럼 장해물이 많을거고 행군 진형변경등으로 시간을 잡아먹을거니 더더욱 오래걸릴에요.
해로나 수로를 이용한다고 해도 배를 타본적이 없는 병력이 태반일텐데요?? 멀미로 고생한 병사들 요양할 방법도 필요합니다. 게다가 중국은 대륙국가입니다. 배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기 힘든 지형이에요.
명령전달에 또 시간이 필요한건 따로하더라도 그 병력들이 움직이는데만 몇달입니다.
그걸 처리하는게 "행정"입니다. 병력이동에 시간이 걸리지언정 처리 못할 문제도 아니고 전쟁이 반짝하고 말것도 아니고요. 저 시대라도 정규군은 또 따로 있는 법이고 향토군도 있고요.
당시엔 100만의 전투병이면 그 3배수인 300만의 보급병이 있어야했습니다. 이들 모두가 먹어야하고요.
그리고 그 병력들이 모이는데는 몇달, 다시 움직이는데 몇달입니다. 국경 근처로 모인다손치면 반대쪽 사람은 거의 년단위로 움직여야합니다. 그 기간동안 이 인력들은 청년이면서 동시에 잉여가 됩니다.
당장 중국보다 훨씬 땅덩이가 작은 조전조차 부산에서 걸어서 한양까지 갈려면 몇달은 걸렀는데요.
진짜 그정도 수를 뽑아서 전쟁할려면 할때마다 경제는 파탄, 농업은 엉망진창에 일년은 준비해야하는데 중국 전쟁기록을 보면 이런말은 없으니까요.
당장 명청교체기의 전쟁만봐도 이전보다는 극히 소규모로 준비했음에도 명나라 재정이 거덜났었습니다. 명보다 생산력이 떨어진 과거 국가들이 십만단위를 우숩게 다룰수 있을리가요.
전쟁준비가 한두달에 뚝딱 끝나겠습니까? 몇년에 걸쳐서 준비하지...
현대전도 전쟁 준비할려면 최소 몇주 단위가 걸립니다. 시간이 걸려서 그렇지 그거 못모으겠습니까.
위촉오 삼국의 전투만해도 몇년씩 갭을두고 싸운게 아니에요.
관도대전과 적벽이 8년
적벽과 한중 공방전이 11년입니다.
굵직한 전투만 추려도 이정도입니다. 그사이 자잘한 전투나 중규모 충돌은 빼고서도 이정도입니다. 그리고 이 전투는 하나같이 수십만은 기본으로 깔고들어간 전투고요.
실제 그정도 규모였다면 이미 적벽때 위나라는 재정파탄을 겪었어야합니다.
몇년 준비하고 한번 전쟁하고 끝나겠습니까?
전쟁중에도 징집은 계속되고 계속 모입니다. 모이고 정비되면 또 전쟁하고요. 그리고 한번 전쟁 진다고 싸그리 전멸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삼국지는 소설이죠... 역사적 사실을 기반한 소설이라 어디부터 어디까지 진실이고 거짓인지는 모를 일입니다.
위의 연표는 실제 정사입니다.
삼국이 합쳐서 4 5천만이라 치면 저전투에서 조조가 잃은 군사가 10만쯤 된다고 쳐도 큰 수입니다.
게다가 그 10만은 원래 농부였습니다. 비유하자면 서울경기권에서 예비군 10만이 죽었는데 죽기전에도 근 1 2년을 놀았다 칩시다. 여기에 보급병 규모나 이들이 배를타고갔단걸 고려하면 경제적 타격은 엄청납니다. 그 배는 전부 손실되었으니까요. 인구의 0.5퍼가 증발한데다가 이들이 전부 한참일할 20 30대였고요.
이것도 정사에 나온 조조의 주장 80만보다 현실적인 16만으로 줄였을때 이야기입니다.
맨위에서부터 읽어보세요...
했던 말 또 해야하나요.
본인 생각에 안될거 같으니까 거기에 끼워맞추지 마시고요.
실제로 적벽대전조차 조조군을 16만정도로 봐야한단게 정설이에요. 이건 연의 100만은 커녕 정사보다도 적은수입니다.
중국 역사서는 그당시 다른 나라역사서와 마찬가지로 과장이 심한건 사실이에요.
명나라보다 생산력 떨어지는 시대에도 16만이 가능했다는건 인정하시는군요. 그거에 대해서 저는 반론할 생각 없습니다.
위에서부터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저는 그런것까지 부정하는게 아니죠.
명의 군사제도 때문이었습니다. 지방군주가 징병을 하는 걸 우려한 명은 중엉애서 지방파견 농민 형식의
상비군 제도를 운영했는데 이 위소에 파견된 관료들은 징벌을 우려해
뇌물을 받고 병적을 빼주거나 탈영한 병사 장부를 가라로 올렸고
이는 명 중반 쯤에 이르러 중앙군을 제외한 파견군들이 유령화 되는 원인이 돱니다.
차라리 징집병 시절이나 봉건제 시절보다 가용 인원이 급감합니다. 유령군이었으니까요.
중국이라면 가능할 숫자일거라 생각되요
수의 고구려원정시 100만대군은 보급합쳐서 백만설이 더 맞다고 봐요.
병력100만.보급200만. 총 300만이 아니라..
요동성에서 우문술애게 별동대로 9군 30만5천을 줬다는 기록이 남아있어서
병력 백만 동원자체는 사실일 겁니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건 완편이었냐?와 이중 얼마나 고구려까지 따라 갔느냐 하는 겁니다.
보급인원의 경우 중국내 보급담당 인원이나
선박제작 하역인원이 포함된 수로
당시 중국에서 고구려 징벌을 위한 배만드는 과정을 묘사하는 기록을 보면
참여 인원의 1/3이 질병으로 죽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로 지옥도 였다고 합니다.
대체 무슨 근거로 정확하게 그 병력들이 동원되었다고 하시는겁니까?
자료는 있으신가요?
사마천의 기록 말고 다른 징집자료와 그 병참자원에 대한 구체적 자료가 존재하나요?
그 숱한 전투에서 계속 수만 수천이 죽고 포로가 되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 합리적 의심이 드는건 상식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면 당연한것 아닐까요?
합리적인 의심을 가진 사람은 다 오만하게 되는건지 묻지 않을수가 없네요.
본인은 합리적 의심이라고 하시는데...
달착륙을 불신하는 사람들도 합리적인 의심을 하는겁니다.
본인이 모른다고해서 거기에 끼워맞추지 마세요.
달착륙은 유시민옹도 의심하던데 말이죠....
너무 나간것 같네요.
참고로 전 달착륙 믿는사람입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했는지에 대한 배경지식을 설명해드리는데 계속 자기 생각에 불가능하다며 합리적 의심이라 하시니까 달착륙을 예로 든겁니다.
유시민님도 달착륙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으니 자기의 합리적 생각에 의해 달착륙을 의심한거고요.
지금 본인도 배경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합리적 의심을 제기하시는거죠.
그럼 양자역학은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이해안가잖아요? 그게 이해가세요? 이해가 안되죠? 그럼 그게 그냥 공상과학인지 소설인지 뭔지 알게뭡니까? 눈에 보이지도 않는데? 수많은 과학자가 공식도 만들고 논문이 있으니 괜찮다? 그럼 중국사는 수많은 전문가들이 논문이나 조사를 안했을까요? 논문 찾아보려는 노력은 해보셨나요?
제가 가진 의구심은 단하나입니다. 많아도 너무 많은 그 방대하고도 엄청난 전투에 동원된 병사와 사망자 그리고 포로가 너무 많아 보인다는 겁니다.
한국전쟁에 대한 사망자와 실종자 그리고 사상자에 대해서 중국과 우리와 북한과 기록이 동일하지 않습니다.
비교적 근래에 일어났던 전쟁임에도 정확한 통계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원론적으로 이게 과연 가능한가?
잠실야구장 만원 관중정도는 한번의 전투에서 쉽게 죽이는 전투가 수시로 벌어진다?
인력보충이 생각보다 쉬웠다라고 밖에 볼수 없는데 말입니다.
실제로 꽤 디테일한 부분까지 다양한 기록이 남은 사례들이 있고(사서와 당시의 각종 자료들), 학자들도 대체로 인정하는 엄청난 대군 출병 사례들도 있기는 있습니다.
또한 동양사서에서 숫자 천 만 등이 수식어(꾸밈어)로 사용되는 경우는 구체적인 수치를 제공하는 것이 아닌 ‘그냥 많았다’ 라는 뜻으로 사용한 경우가 많으니 염두에 두고 읽어야합니다.
대중서에서는 비전문가인 독자의 흥미를 위해서 이런 숫자들을 제시하지만 전공에서는 수치보다 행정조직등에 더 비중을 두고 살핍니다.
우리에게 큰 전투만 잘 알려져 있어서 몇십만이 흔한 것처럼 보이지만 장수 누구가 어디어디 소속의 병사 몇백-몇천을 거느리고 몇백 몇천과 싸워 이겼다는 기록이 더 많습니다.
수양제의 고구려 공격시 동원한 병력은 과장이 있다 하더라도 실제 편제가 나타나는 점 등을 미루어 볼때 60-70만 정도는 실제로 동원한 것으로 보고 있고 실제로 동원 병력이 기록된 113만 3800명일 가능성도 무시못합니다.
여기에 전투병력, 병참지원 등등 싹 다 끌어다 모은 숫자 아닐까요?? 여기에 구라도 좀 섞구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역사 기록에 쓰여진 기록은 '전쟁터에 나간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아닙니다. 전부 행정 기록이란 겁니다. 그것을 나중에 역사서를 기록할 때 사용한 것이죠. 행정 기록이란 무슨 뜻이나면, 전쟁에 필요해서 동원했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직접적인 전투 만이 아니라, 보급과 운송을 포함한 모든 작업에 필요한 인원을 뽑아갔다는 뜻이죠. 우리가 보는 역사서에는 몇가지 시간차이가 존재합니다. 1) 사건이 발생한 시간 2) 사건을 기록한 시간 3) 기록을 보고 역사서를 작성한 시간 이죠. 우리는 역사서를 보고 당시에 발생한 사건과 역사서가 동시에 만들어진 것처럼 생각하지만, 당시에 만든 기록이라는 것과 후대에 역사서로 만든 기록은 입장의 차이가 있습니다. 당시에 113만을 동원했다고 한다면 그들이 전부 전쟁터에 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 전쟁터에 나오는 사람은 훨씬 적죠. 하지만, 뒤에 남겨진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 사람이 전쟁터에 나가건, 아니면 그 뒤에서 키보드나 두드리고 있건 뭐가 중요할까요. 지금 당장 자리에 없는게 중요한데요. 그래서 당시에는 그런 사람들까지 전부 기록하였기 때문에 기록이 뻥튀기 되는 것처럼 보이는 겁니다.
그리고 각 사회의 군사 동원력은 사회의 구조, 형태마다 다릅니다. 유목사회의 군사동원력과 농경사회의 군사동원력이 다른 것처럼요. 조선의 경우를 예로 들어서 1만 군대를 동원하기도 버거워했다느니 그런걸 보고 고대 중국의 사례를 상상하시면 곤란합니다. 조선은 사대외교로 국방의 상당부분을 명나라에 의존하고 그동안 극단적으로 군사비를 줄인 나라였으니까요. 반면에 예를 들어 유목민족의 경우에는 말을 타고 나갈 수 있는 성인 남성 거의 전원이 군대에 동원됩니다. 이 두 사회는 인구의 차이는 어떨지 몰라도 군사력에서는 상당한 차이가 나타나죠. 인구의 증가를 가져오는 두가지 요인은 첫번째 농업생산력 두번째는 의료기술의 발전입니다. 첫번째 분기점은 대개 송나라 시기로 봅니다. 두번째 분기점은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넘어가는 무렵이죠 또 고대 중국은 물론이고, 고대의 동서양의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인구의 최대치를 생산하고, 또 많이 죽고 또 많이 생산하기를 반복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피임이라든지 인구조절이라든지 이런게 없었으니까요. 그냥 낳을 수 있는데까지 최대한 낳고, 병에 걸려 죽거나 굶어 죽거나 전쟁통에 죽거나 하면 인구가 줄어들고, 만약 전쟁이 없거나 평화가 오면 수십년 만에 인구가 원래대로 회복되기를 반복합니다. 이게 이상해보이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런 안정성이 존재합니다.
싸울수 있는 남자는 다 징집해 가던 시기였으니......뭐 가능하지 않았을까요?
제목은 '이유' 라고 적혀있지만, 실제로 '이유'는 없고 '주장'만 있으니 받아들여지기는 쉽지 않은 글인 것 같습니다.
물론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1600 기병에 산산히 흩어져 버렸지만.
평균 수명 : 40세
징집연력 15~40세...불가능한것만은 아닐걸요.. 그래서 전쟁에 지고 죄다 죽거나 포로되면 나라 망하잖아요.
위에 적었던것처럼 기원전 한무제시기만 해도 적어도 4천만은 찍었으리라 보는게 중국입니다 지금 한국 인구가 5천만에 상비군 60만이니 상비군이 아닌 농민 징집군 100만 일으키는건 충분히 가능하죠
시스템 체제의 낙후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중국의 통치 체계는 정말 발전이 어마어마하게 빨랐습니다 한나라 시기에 관료제가 이미 어느정도 자리 잡혔고 율령,3성6부로 행정시스템을 완성하고 과거까지 도입한 수당시대는 통치 기술로는 오버테크놀로지 수준입니다
보급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과거라 보급이 부족한 만큼 병사에 대한 대응도 엉망이라 가능했습니다
100만을 대외 전쟁에 투사하는건 유지 못한다? 맞습니다 그래서 수가 망했죠
보급이 안정적으로 되어야만 전쟁하는게 아니라 통치자가 승질난다고 보급이 불안한 상황에서도 전쟁하는거구요 사실 식량은 보급보다 현지 약탈 위주입니다
그렇게 많은 군사를 자주 일으킬 수 있었던 이유 중 한가지는 전사자가 비교적 적었기 때문입니다 즉 전멸은 사망이 아닌 사기 저하 및 지휘체제 붕괴로 병사들이 도망가는거지 사망하는게 아니지요
그래서 기원전에 천만이 넘었단 한나라의 호구수는 삼국시대에 위촉오 다 합쳐 2,3백만으로 줄어듭니다 그런데 통일후 금방 다시 불어요 백성들이 죽어서 줄어든게 아니라 통치 체제에서 벗어나 안잡혔던거라 그렇습니다
총력전이 1차세계대전에 나왔느니 머니 유럽의 역사 구분을 타 지역에도 적용하는건 완전한 실수 입니다
유럽이야 각국의 지배층이 나라를 넘어 공통의 언어를 쓰고 혈연으로 얽히며 나라와 나라간의 차이보다 계급의 차이가 더 두드러졌고 어느정도 국경이 고착화됨에 따라 민족의 개념이 두드러지며 각 나라가 쪼개지는데
역으로 중국은 한나라시기에 한족이란 정서가 정립되고 외부로부터 공격해온 민족이 융화되는 식으로 진행됩니다 무협지에 모용세가라 나오며 명문이라 만하는 모용씨는 5호 즉 오랑캐였죠
여기에 총력전 개념이 1차세계대전 이후에나 나왔다고 이야기 하는건 정말 안맞는 개념인데
유럽은 중세시기 통치체계 붕괴로 아주 작은 주변만 다스리는 체제라 국가가 힘도 없고 각국의 지배층은 지배층 대로 친교관계인데다가 피지배증도 기독교라는 공통 분모가 있어 총력전을 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거기에서 탈피되는 근대에 왔기에 이런 체제를 총력전이라 하는거지 고대 국가의 전쟁은 총력전이라 봐도 거의 무방합니다
전국시대 진의 국가 통치체제 그리고 장평대전등의 학살을 보면 그 전쟁의 성질이 중세 유럽에 가까운지 1차 세계대전에 가까운지 보이죠
사실 통치제제 말고도 기술의 차이도 어마어마하지만,아니 고삐 조차도 이상하게 매어서 육상 수송력이 크게 떨어진 유럽이 너무 떨어졌다고 해야하나
특히 몽골 지배 이전 송나라까지의 중국의 발전은 가볍게 볼 성질이 아닙니다 통치 체계는 유럽이랑 거의 천년 차이나요
보통 북방민족은 보급은 약탈로 채우고 한족은 직접 가져간다고 하던데...
한족도 약탈이었을까요????
사마천이 위대한 역사가로 칭송 받는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교차 검증 해보면서 사실을 기록하는데 평생을 바친 사람입니다.
군사 규모로 보면 춘추시대에는 만명단위 그게 전국시대의 총력전으로 넘어가면서 십만명대로 늘어납니다. (이때 한국은 역사 기록도 없습니다)
지금 중화인민공화국과 고대 중국대륙에 존재했던 국가들을 동일시 하면 안됩니다.
사실 관계가 조금 다른 부분이 조금 있습니다.. ㅎㅎㅎ
그렇다고 해도 역사 기록을 토대로 한거라 뻥으로 쓴건 아니죠.. ㅎㅎ
혹시 송도진님 말씀하시는 건지요. 저도 재미있게 잘 보고 있습니다. 사마천의 사기에 오류가 많은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한무제때 사람이니까요. 개인적으로 가장 위대한 역사가라고 믿습니다.
이거 잘 되야 후한서도 연재하라고 꼬시는거라.. (이미 열전 2/3 정도 해놓으셨거든요..)
전쟁하는데 중국이 뻥이
심하죠
훨씬 적게 잡아서 분석했던 글을 본 적이 있네요. 정확한 병력의 수는 모르겠지만요.
그 글에서는 일기토 전투(장수가 패배하거나 사망한 부대는 퇴각- 사기가 뚝 떨어졌을테니)가 발달한 게, 병력을 아끼기 위해서 라는 분석이 있던 걸로 기억합니다.
1. 100만명이나 동원하면 나라가 망한다 -> 망했음.
2. 저 인원에 대해서 보급이 불가능하다 -> 보급에 실패했음.
전쟁 같이 성인남자만 죽는 인구감소는 생각보다 금방 회복됩니다. 저 시대만 해도 땅보다 인구가 부족할 때라
역사기록 어느 책을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의외로 굉장히 현실적입니다. 유명하거나 역사상 주요한 전쟁들에서 십만, 십수만 동원되면 대군이에요. 수만 단위의 전투가 주력입니다.
고대인이 무슨 바보천치도 아닌데 똑똑한 현대인이 미개한 세계로 가서 현대의 발달된 지식으로
세계 정복한다는 스토리텔링류와 비슷한것 같네요.
고대 왕조가 무슨 원시시대 부족도 아니고......
사람도 너무 많이 죽고
역사 조작 ㄷㄷ;
적벽대전도 사기 기록은 10만근처일겁니다.
중일전쟁조차 중국 전체와 일본이 충돌한게 아니고 지방군벌1개와 충돌한건데.
1800년도즈음까지 중국이 전세계 경제력의 30%이상 차지했다는걸 감안하면 양념을 심하게쳤다고해도 무시할만한 기록이 아닙니다. 지금 천조국이라고 하는 미국보다 훨씬 비중이 높았죠.
우리나라 신라가 당과 마지막전쟁할때 신라의 동원기록을 보면 당나라 몰아내는데 실패했으면 그냥 멸망이였습니다. 약 40만근처엿을겁니다. 들에는 아낙과 아이들만 남았다고... 그래서 고구려나 부여가 대단한점이 있죠. 통일신라 민정 문서를 보면 당시 당나라가 대충기록했는데 그정도면 실제로는 인구가 더 많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당시 전쟁사기록들을 자세히보면 보급선은 보통 중간기착지까지만 육로고 수군이 보급하는 형태가 많았습니다. 이걸 쳐서 이긴경우가 많죠. 임진왜란도 충무공께서 보급로를 박살내셔서 왜군이 확꺽인거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