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혁명완성님 그때는 신하들의 입김이 더 쌔서 왕이 제대로 힘을 못 쓸 시기였지 않을까요? 신하들이야 자기 세력을 구축하려면 본인들 식구들이 관직에 있는게 좋죠. 신분이 낮은 사람들을 등용하면 반대로 왕에게 충성심이 높을 확률이 높고 왕의 세력을 구축하기 좋은것이라 생각됩니다.
guwory
IP 203.♡.49.1
11-06
2019-11-06 09:4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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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이 없었을리가요 정통성에 이상이 잇는 것도 아니었고
역모죄 걸어서 사람 많이 죽였는데요 세금도 많이 걷으시구요
힘이 없었다면, 오히려 중종, 인조가 더 없었겠죠 선조는 대표적으로 힘 쓴 왕인데, 선조도 역시 비율이 낮네요
저게 특정지역 성 내의 인구통계로 압니다. 양반들이 갈수록 거기 모여산거죠. 애초에 양반을 돈주고 살수 있다 해도 상식적으로 인구 대부분이 양반이라는게 말이 되나요. 그정도로 돈 많은 양민이 많을리도 없고요.
삭제 되었습니다.
빵꾸똥꾸
IP 118.♡.8.173
11-06
2019-11-06 09:3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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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교과서는 학계의 정설이 매우 늦게 반영되는 걸로 압니다... 당장 저도 자본주의 맹아론 배우고 그랬는데 이미 학계에선 자본주의 맹아론 부정된지 오래거든요.(그렇다고 식근론 따르는 것도 아니지만) 국사교과서에 그런게 찾아보면 한둘이 아니에요.
삭제 되었습니다.
스윙체어
IP 211.♡.130.222
11-06
2019-11-06 10: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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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의 신분이란게 영속적인게 아닙니다. 최소 생원, 진사과에 합격한 경우에 본인 + 아래 3대 즉 아들 손자 증손자 까지만 양반의 지위를 보장했고 과거 급제자가 나오지 않으면 양반의 지위가 박탈되고 양민이 되는 구조라서 양반이 무한 증식 가능한 구조는 아니었습니다.
고바리안
IP 223.♡.21.61
11-06
2019-11-06 12:3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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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윙체어님 첨언하자면 '보장'이나 '박탈'이라는 용어는 적절치 않은 것 같네요. 양반이라는 지위는 공식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관습적인 개념이니까요
IP 125.♡.123.52
11-06
2019-11-06 14:03:49
·
일본인 학자가 일제강점기 시기에 펼친 주장이 아직까지 이렇게 통용되는군요. 첨부하신 그래프의 양반층 증가는, 말 그대로 양반층 분류를 기계적으로 한 결과입니다. 양반이 주로 사용하던 직업 명칭이 호적에 기재되어 있으면 무조건 양반으로 간주하고 통계를 내었기 때문이죠. 실제는 양반층이 증가한 것이 아니라, 양반의 직업 명칭을 중인, 평민도 널리 사용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인데 말이죠(=사회에서는 아무도 양반으로 대우하지 않았음).
PS44444
IP 39.♡.26.61
11-06
2019-11-06 09:2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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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아봤자 양반
삭제 되었습니다.
미디르
IP 14.♡.116.110
11-06
2019-11-06 09:2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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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로 갈수록 대리시험에 뇌물에 .. 본래 취지가 사라졌죠.
지평선화살
IP 39.♡.28.232
11-06
2019-11-06 15:4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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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르님 제가 하고 싶은 말이었습니다. 저자료가 신뢰성을 가지려면 과거제도는 완벽히 통제되고 공정하게 관리되었다는 전제가 성립해야 하는 데, 후기 말기로 갈 수록 매관매직 부정부패는 심해졌고 신분사고 파는 등의 신분제 붕괴도 일어나고 있었으니깜요
IP 203.♡.145.172
11-06
2019-11-06 09:3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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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통계를 작성할 수 있을 정도로 꼼꼼한 기록을 가지고 있는 조선왕조실록의 위엄 ㅎㄷㄷㄷ
@님 실록도 당연히 활용됐겠지만 이런 연구의 주요 자료는 방목과 족보일 겁니다 실록에는 과거 시행에 관해 대체로 간략하게 기록합니다
별무리---*
IP 223.♡.46.123
11-06
2019-11-06 09:4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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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은 진짜...
솔직히 태종이 싹 다 기반 잡아서 세종대왕이 나올 수 있었죠..ㅎㅎ
슈퍼 멜론
IP 106.♡.180.12
11-06
2019-11-06 09:5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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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후기 순조, 철종, 고종 정도로 기억되는데,,, 이 시기가 되면 특정 지방은 지방관이 중인 출신만 배치되는.... 이른바 2급지 취급하는 곳이 대놓고 말해질 정도로.,,,, 양반 아닌 계층에게도 관직(지방관은 상당히 고위직임.)이 열려잇었다고 합니다.
삭제 되었습니다.
hiStoryshun
IP 211.♡.46.47
11-06
2019-11-06 11: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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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고려되어야 하고... 저 통계는 당시 시대를 무시한 기계적 통계 아닌가요. 깊게 들어가면 끝도 없겠지만 시대별 양천제의 변화를 어떻게 고려하였는지, 급제자의 범위를 어디까지 산정한 것인지 등등 비판 덩어리네요. 오늘 '시험과 계급의 상관관계'를 느낄 수 있는 자료가 여럿 보이는데 의도성이 있다 추정해도 되겠지요..?
광해군 이후로 낮은신분의 급제자가 늘었다는건 좋게 해석 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관료사회의 부정부패가 점점 만연해져갔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네요. 돈만 있으면 급제하는 세상..현재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을 것 같아요.
IP 125.♡.123.52
11-06
2019-11-06 14: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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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에는 양반층이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비양반(향리 출신)의 과거 급제 비율이 높았죠. 중종-선조 시기까지 신진사대부가 자리를 잡는 시점이고 유학(유교)이 확고하게 자리잡게 되었고요. 후기에 들어서 다시 낮은 신분층의 과거 급제가 늘어난 것은 서얼 허통 운동의 여파가 큽니다. 말이 서얼이지, 서자의 후손이라서 이리저리 이사 다니면서 양반 행세를 하기는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과거에 급제하더라도, 이름 있는 가문이 아니었으면 높은 관직(요즘의 장관급, 차관급)까지 절대 오르지 못했던 것이 현실이었죠.
dumbx3
IP 59.♡.235.15
11-06
2019-11-06 15:4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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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법적인 신분제는 양천제(양인 or 천민)이었지만 실질적인 신분제는 양인중에서도 양반사대부와 그 외 신분을 나누었죠... 저기서 말하는 낮은 신분은 양인들 중에서도 양반사대부가 아닌 자들을 말하는 거죠(중인, 서얼, 몰락양반 등)
내가 과거시험 해봐서 아는데~~~~라고 얘기할 수 있는
먼치킨님이시죠
모순을 극복한 개혁의 아이콘이죠
단적인 사례가 사병으로 쿠데타를 일으키고 사병혁파한
바로 정부 요직에 꽂히는 거니까
광해군. 역시 암군&폭군 맞네요
한때 재평가 하다가, 요새는 재재평가
정통성에 이상이 잇는 것도 아니었고
역모죄 걸어서 사람 많이 죽였는데요
세금도 많이 걷으시구요
힘이 없었다면, 오히려 중종, 인조가 더 없었겠죠
선조는 대표적으로 힘 쓴 왕인데, 선조도 역시 비율이 낮네요
상대방 정적 제거에 역모죄 거는 일은 조선왕들에게 적지 않게 있었던 일입니다.
선조와 고위관료 도망갈때 후방 수습하고 민심 다독였던 사람이 광해군이었습니다.
초기 제외하고는 신하들의 입김이 센 나라가 조선이었습니다.
당파색이 왜 나왔겠습니까?
광해군 시절에는 대북파의 입김이 셌던거고요.
역사저널에 광해군 관련 비판적인 사람 나왔던적 있었지요?
평가가 극단적으로 갈릴때는 옹호하는 측의 사람도 같이 나와서 사람들이 평가하게끔 만들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저 자료만으로 뭘 평가하기 힙듭니다.
조선초기는 새로운 왕조개척으로 인해 폭 넓게(인맥 천거?) 인재등용한거 같고 후기로 갈수록 매관매직이 성행했던거라 시험쳤다고 볼수도 없을것 같습니다.
과거제도 자체가 무력화되었던 시기죠
선조는 신하협박으로 왕권을 끌어올렸구요
광해군이 각종 역모건으로 사람 많이 죽인거는 사실입니다.
실록이 광해군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더라도, 기본 사건은 실어주죠
그리고 대댓글 읽다보니, 과거 급제자 비율로
암군&폭군을 평가할 수 없다고 의견을 수정합니다.
세자 책봉, 이후 선조가 흔들기는 했지만
왜란때의 활약 등으로 인하여
즉위시 문제 없엇죠. 흔드는 세력도 없었구요
역사공부를 안해서 잘 모르겠지만, 혈통좋고 가문좋은 당파와 개천용난 스타일 당파들이 언제나 싸우는 형국이었다고 봅니다. 왕손들 왕비혈통따라 파벌갈리고 죽고죽이는... 보수? 진보? 구도의 싸움은 끝이 없었죠.
힘이 있었다고보면 반정이 용납되거나 성립되기 어려웠겠죠.
말그대로 그 세력을 제압하거나 조절할 수 있는 것이 힘이니까요.
모순되는 주장입니다.
선조도 광해같은 출신에 선조가 그게 컴플렉스 였으니까요
괜한걸 트집잡아, 갖은 옥사를 일으켰구요
그래서 역모죄를 "걸었다고" 표현한 겁니다
정작 허접한 반정사건에 제대로 대처 못하고, 밀려났죠
광해가 왕이 되는 거죠
세자 책봉에 문제 없고, 책봉 이후에도 문제 없었으니까요
경쟁 왕자도 없다고 봐도 무방하구요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301211131883899
http://www.donga.com/news/article/all/20130122/52512357/1
위 기사들에서 보면 "신분이 낮은"이 뜻하는 것은 "평민과 서얼 등"이라고 봐야합니다.
......
한 기사에 명확하게
"여기서 신분이 낮은 급제자란 ‘방목’에 본관이 기록되지 않은 급제자, 족보가 없는 급제자, 족보에 본인이나 아버지 이름만 보이고 그 윗대의 가계가 단절된 급제자, 시조가 된 급제자, 향리·서얼 출신 급제자 등이다."
라고 설명 해놨네요.
"족보도 없는 어중이 떠중이, 첩의 자식이라 족보에 올라가지도 못한 사람, 농공상에 종사하는 평민"들을 뜻하는 것 같습니다.
단지 한자 공부할 시간에 일을 해서 그렇지;;
첨언하자면 '보장'이나 '박탈'이라는 용어는 적절치 않은 것 같네요. 양반이라는 지위는 공식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관습적인 개념이니까요
실록도 당연히 활용됐겠지만 이런 연구의 주요 자료는 방목과 족보일 겁니다 실록에는 과거 시행에 관해 대체로 간략하게 기록합니다
솔직히 태종이 싹 다 기반 잡아서 세종대왕이 나올 수 있었죠..ㅎㅎ
이 시기가 되면 특정 지방은 지방관이 중인 출신만 배치되는.... 이른바 2급지 취급하는 곳이 대놓고 말해질 정도로.,,,, 양반 아닌 계층에게도 관직(지방관은 상당히 고위직임.)이 열려잇었다고 합니다.
오늘 '시험과 계급의 상관관계'를 느낄 수 있는 자료가 여럿 보이는데 의도성이 있다 추정해도 되겠지요..?
학계 원로시니 우선 믿어봐야겠지만 말입니다.
조선초기와 말기에는
평민들이 '부유'한 사람이 많았다는 뜻이겠죠.
최소한 책을 사고
한자를 해득하고
과거시험에 몇년 매달릴수 있으려면...
어째 태종때 50%까지 ㄷ ㄷ ㄷ
최고령 합격자는 85세에 합격...최연소 합격자는 13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