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오키나와라서 그런지는 확인키 어렵겠지만, 오키나와에서야 일본과는 다른 인식이 있을 수 밖에요.
이미 일본 본토에서 이주해온 일본인이 많이 살고 있어 많이 희석됐긴 했지만요.
다만 일본 본토 내에서도 양심적인 시민 활동을 하는 사람도 꽤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에서 위안부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한 계기가 오키나와에서 발견된 한국인 위안부 할머니 때문이었는데요.
오키나와가 미군정 아래 있다가 1972년에 미국이 일본에 주기로 결정합니다.
그러고 이제 일본이 오키나와에 다시 주권을 행사하게 됐을 때, 한 할머니가 다급해졌습니다.
우리로 말하면 주민등록이 되어 있지 않은 겁니다.
왜냐면 속아서 일본에 위안부로 와서 오키나와에 있을 때 일본이 패망하고, 부끄러움으로 인해 고향에는 차마 돌아갈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냥 눌러 앉아서 미군이 오키나와에 주둔하면서 미군 상대로 성을 팔며 살아가다 나이가 드니 나중에는 이런 저런 일을 하며 오키나와에 계속 살았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일본이 오키나와에서 남아 있는 조선인은 신고를 하라고 했는데 그 당시 할머니가 한글도 일본어도 문자를 몰라서 제때 신고를 못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오키나와가 일본으로 넘어가게 되자 일본은 등록되지 않은 사람이라고 추방하려고 했죠.
다급해진 할머니가 자신이 위안부임을 밝힘으로써 일본에서 서서히 위안부 문제가 알려진 거죠.
몇 년 후에 언론과 인터뷰를 하며 알려졌고 이런 걸 통해 일본 시민사회가 위안부 문제 등 과거사에 대해 반성을 시작했고 정부에도 이에 상응한 조치를 요구하게 됩니다.
이게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초중반 무렵, 일본에서 무라야마 담화, 고노 담화 같은 나름대로의 반성을 나타내는 배경이 됩니다.
그치만 결국 일본은 전쟁 책임을 인정한다는 것이 일왕에 대한 책임론이 불거질 수 밖에 없고,
일본에서 일왕의 존재로 인해 이 흐름은 더 이상 나갈 수 없었고,
다시 원래대로처럼 전쟁 책임 부인과 우경화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오키나와에만 위안부가 있던 곳이 130곳이 넘었다고 해요. 일본인과 오키나와인도 있었다고 하지만 거의 대부분이 조선인이었다고 하고 조선인 위안부가 전쟁 말기에 1,000명이 넘었다고 하죠. 그러니 상당히 대규모였던 거죠.
잡설이 길었는데, 그래서 오키나와에서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당시 알려진 정도가 일본 본토보다는 좀 더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징용된 조선인도 꽤 있었고 희생된 사람도 많았습니다.
저 분의 활동이 그 직접적인 영향인지야 알 수 없습니다만.
기사에는 평화의 소녀상을 만든 한국 작가 부부와의 교류와 이번에 이 소녀상 등 위안부와 징용 등에 대한 작품들이 전시되던 행사가 중단된 것에 대한 것으로 위안부상을 직접 만들게 된 걸로 나오지만,
이미 과거에 징용 관련된 작품을 만든 적이 있던 분이라고 나오는 걸 봐선 확신하긴 어렵지만 이런 문제에 관심이 많으셨던 분 같습니다.
미스릴
IP 218.♡.183.122
08-14
2019-08-14 02:41:10
·
오키나와는 본토와 온도 차가 있죠.
프림커피
IP 121.♡.11.184
08-14
2019-08-14 02:52:58
·
한의 비는 오키나와 에서도 거진 북부 정도 되는 위치에 가는 도로에 아무런 안내 표지도 없고 그 부조 조각 작품의 위치도 찾기가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찾아 갔을 당시에는 주차장도 없으며, 주변에 주류를 구매해서 한의 비 조각상에 바치려고 해도 그 흔한 편의점 구멍가게 하나 없더군요.
그냥 계속 일본...
한때는 한국에 복속을 요구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만..
오키나와..정말 기구하죠.
이미 일본 본토에서 이주해온 일본인이 많이 살고 있어 많이 희석됐긴 했지만요.
다만 일본 본토 내에서도 양심적인 시민 활동을 하는 사람도 꽤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에서 위안부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한 계기가 오키나와에서 발견된 한국인 위안부 할머니 때문이었는데요.
오키나와가 미군정 아래 있다가 1972년에 미국이 일본에 주기로 결정합니다.
그러고 이제 일본이 오키나와에 다시 주권을 행사하게 됐을 때, 한 할머니가 다급해졌습니다.
우리로 말하면 주민등록이 되어 있지 않은 겁니다.
왜냐면 속아서 일본에 위안부로 와서 오키나와에 있을 때 일본이 패망하고, 부끄러움으로 인해 고향에는 차마 돌아갈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냥 눌러 앉아서 미군이 오키나와에 주둔하면서 미군 상대로 성을 팔며 살아가다 나이가 드니 나중에는 이런 저런 일을 하며 오키나와에 계속 살았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일본이 오키나와에서 남아 있는 조선인은 신고를 하라고 했는데 그 당시 할머니가 한글도 일본어도 문자를 몰라서 제때 신고를 못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오키나와가 일본으로 넘어가게 되자 일본은 등록되지 않은 사람이라고 추방하려고 했죠.
다급해진 할머니가 자신이 위안부임을 밝힘으로써 일본에서 서서히 위안부 문제가 알려진 거죠.
몇 년 후에 언론과 인터뷰를 하며 알려졌고 이런 걸 통해 일본 시민사회가 위안부 문제 등 과거사에 대해 반성을 시작했고 정부에도 이에 상응한 조치를 요구하게 됩니다.
이게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초중반 무렵, 일본에서 무라야마 담화, 고노 담화 같은 나름대로의 반성을 나타내는 배경이 됩니다.
그치만 결국 일본은 전쟁 책임을 인정한다는 것이 일왕에 대한 책임론이 불거질 수 밖에 없고,
일본에서 일왕의 존재로 인해 이 흐름은 더 이상 나갈 수 없었고,
다시 원래대로처럼 전쟁 책임 부인과 우경화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오키나와에만 위안부가 있던 곳이 130곳이 넘었다고 해요. 일본인과 오키나와인도 있었다고 하지만 거의 대부분이 조선인이었다고 하고 조선인 위안부가 전쟁 말기에 1,000명이 넘었다고 하죠. 그러니 상당히 대규모였던 거죠.
잡설이 길었는데, 그래서 오키나와에서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당시 알려진 정도가 일본 본토보다는 좀 더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징용된 조선인도 꽤 있었고 희생된 사람도 많았습니다.
저 분의 활동이 그 직접적인 영향인지야 알 수 없습니다만.
기사에는 평화의 소녀상을 만든 한국 작가 부부와의 교류와 이번에 이 소녀상 등 위안부와 징용 등에 대한 작품들이 전시되던 행사가 중단된 것에 대한 것으로 위안부상을 직접 만들게 된 걸로 나오지만,
이미 과거에 징용 관련된 작품을 만든 적이 있던 분이라고 나오는 걸 봐선 확신하긴 어렵지만 이런 문제에 관심이 많으셨던 분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