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은 어디까지나 '왕릉치고는'이라는 전제가 붙긴 하지만 꽤 소박한 편입니다. 부장품도 없다시피하고 무덤도 석물 좀 세운거말고는 그냥 일반인 무덤보다 크기를 뻥튀기한 큰 무덤일뿐이죠.
반면 옆나라 중국의 황릉들은 무덤이라기보다는 산이나 궁전이라고 말하는게 더 어울릴 만큼 크고, 부장품도 어마어마합니다.
물론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이 현대보다 훨씬 강하고 군주의 권위가 불가침의 영역 정도로 여겨지던 시절이라 무덤을 검소하게 쓴 조선왕릉이 오히려 특이한 케이스인 셈입니다만 결과적으로 중국의 황릉을 비롯한 상당수의 외국 군주들의 무덤(심지어 한국도 삼국시대 무덤은 도굴 많이 당했죠)들은 도굴당해서 빈 깡통이 된 반면 좋게 칭찬하자면 검소하고 나쁘게 비판하자면 초라한 조선왕릉은 정치적인 이유도 있긴 하지만 거의 대부분이 도굴을 피하고 문화재로 남을 수 있었죠.
결국 지나친 탐욕은 죽어서도 액을 만듭니다.
덕분에 지금까지도 서울에서 개발이 안되고 자연 그대로 남아있죠..
자세한건 .. http://royaltombs.cha.go.kr/html/HtmlPage.do?pg=/new/html/portal_05_06_05.jsp&mn=RT_05_06_05
거기에다 조선의 성리학은 사대부라는 양반들이 중심이라서 왕마저도 사대부의 견제와 간섭을 받고,
성리학을 사대부보다도 더 엄격히 따라야 했기에, 왕의 학문이 부족하면 은근히 무시당할 정도였죠.
왕이 다른 나라보다 사치를 부리기도 어려웠고 정사를 돌보는 걸 등한시하기도 어려웠습니다.
조선시대 왕만큼 하루 시간표가 정해지고 그 안에서 일을 해야 했던 왕은 세계에서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걸 조금 게을리하거나 사치를 부리면, 곧바로 사대부들이 상소하고 지적하고요.
왕에게 직언하는 게 목적인 기관과 직위조차 있었죠.
사간원이 바로 그것이고, 사헌부, 홍문관과 함께 삼사라 불리는 이들이 요새로 말하면 언론으로서 역할을 했습니다.
드라마에서처럼, 성군이 되려면 이래야 합니다!가 평생 왕이 귀에 못이 박히게 듣는 소리였던 거죠.
게다가 사관은 왕의 행실 하나 하나까지 다 기록했으니, 왕이 느낄 부담은 상당했겠죠.
상 중의 절차를 어떻게 하냐를 가지고 사화를 일으킬만큼 아주 작은 것 하나 하나 성리학과 과거 관례를 따라야 했습니다.
그래서 조선시대 왕궁조차도 중국, 일본에 비해 검소해 보이죠.
왕릉 해당 지역 소유했고, 제사에 대한 권리를 유지했고, 이어서 현대가 되면서 국가도 보호했으니 가능했던
거죠. 만약 조선이 임진왜란쯤에 망하고 새 왕조 들어섰으면 조선 왕릉들도 죄다 털렸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