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학기 마친 대학원생입니다
학부를 국내, 해외 두 곳, 석사 한 곳, 그리고 박사 2년차인데 이번 학기가 제일 힘드네요... 문돌이 박사들 존경합니다...ㅜㅜ
예전에 비트겐슈타인 논고 일부에 대해 짧게 소개글을 썼었는데요
그 뒤로 바쁜데다가 체력이 후달려서 손을 놔버렸다가 오늘 성적 제출이 끝나니 할 게 없어서 논고의 나머지 부분 짧게 소개글 써서 올려드립니다
심신이 피폐해진 관계로 댓글 하나하나 반응을 못해드릴 수도 있사오니 너그러이 이해해주시길 바라보겠습니다 ㅎㅎ
그리고 저는 어디까지나 아직도 학생 나부랭이기 때문에 틀린 부분/부족한 또는 과한 해석이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오니 부디 가볍게 읽어보시는 정도로만 보시고 제대로 공부하실 분들은 제대로 된 자료로 공부하시길 추천드립니다 ㅎㅎ
(참고로 비트겐슈타인은 국내에도 논문이 많지는 않아도 몇 편있고, 한국어로도 번역이 되어있어서 읽기 편하실 겁니다ㅎㅎ 영어 자료를 보실 거면 언제나 plato.stanford.edu 추천드리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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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기 철학 (논리철학 논고)
일단 '말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선 예전에 올렸던 글에 좀 더 자세히 적어놓았으니 심심하시면 읽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1.1
아마도 많은 분들이 '철학'하면 떠올리는 내용은 대부분 형이상학일 겁니다
존재, 진리, 경험, 신 등등의 개념들을 무언가 초월적인 것 (신이나 그러한 신을 알 수 있는 인간의 특별한 능력인 이성 등등)과 연결시켜서 이 개념들을 설명하는 작업을 전통적인 형이상학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나싶기도 한데요
비트겐슈타인이 볼 때 이런 형이상학으로서의 철학은 자연과학과 달리 '사실'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사실은 'X가 이러이러하다' (또는 'X가 이러이러하게 있다') 같은 식으로 표현되는 것들입니다 (사태(state of affairs)라고도 불립니다)
가령, 노트북이 있을 경우, '노트북은 검정색이다', '노트북은 테이블 위에 있다', '노트북은 두껍다' 같은 식으로 말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해 굉장히 평이하게 말해질 수 있는 게 바로 사실인거죠
그런데 형이상학적인 개념은 이런식으로 말할 수 없죠
'X'자리에 '존재'라는 개념어를 넣었을 때, '노트북'처럼 평이하게 말할 수 있는 '이러이러한 것'은 없죠. '존재'만이 아니라 다른 개념어도 마찬가지죠
결국 '사실'이라고 불릴 수 있는 건 자연에서 발견되는 대상의 자연적인 성질들 밖에 없게 되면서, '사실'을 말하는 명제들은 자연과학의 명제들밖에 남지 않게 되죠
그래서 논고의 마지막 무렵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대략 이런 식으로 말합니다
: 누군가 철학적인 명제들을 말했을 때 그에게 그 명제가 자연과학적인 명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그 명제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만이 철학을 하는 가장 올바른 방법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흔한 논리실증주의자 같기도 하죠
근데 비트겐슈타인은 마찬가지로 논고의 말미에 대략 이런 식의 말을 합니다
세계를 제대로 보고 싶은 사람들은 자신이 타고올라온 사다리를 걷어차야한다
논고의 말미에 온 독자를 염두에 두고 쓴 말이라면, 결국 지금까지 논고에 담겨있던 명제들을 부정하라는 말처럼 들리죠
그럼 이걸 어떻게 이해할지 간단히 짚어보죠
1.2
논고의 5번 명제의 세부 명제로 등장하는 개념 중에 흥미로운 개념이 있습니다
철학적 자아, 형이상학적 자아, 형이상학적 주체, 뭐 이런 식으로 변용되면서 등장하는 개념인데요, 간단히 말하면 '사실'이 아니지만 존재할 수밖에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겁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시야를 예로 듭니다
가령 내 시야가 완벽해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을 볼 수 있다고 해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내 시야에 들어올 수 없는 게 있죠 바로 그 시야를 가능케하는 눈이죠 (사물에 비친 눈은 가능할지 몰라도, 그건 사물에 비친 눈이지 내 눈이 내 눈에 보이는 게 아니죠)
비트겐슈타인에게 세계란 사실들의 총체입니다
사실들의 총체로서의 세계 속에 존재하면서, 'X는 그러그러하다' 같은 식으로 표현되지 못하는 존재가 바로 철학적 자아라는 무언가라는거죠
다시 말해, 사실들을 바라보지만 (눈이 시야를 갖듯), 그 자체는 사실이 아닌 (눈은 눈의 대상이 못되듯) 무언가가 바로 철학적 자아라는거죠
그러면 이건 사실 중의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세계의 일부일 순 없어야할텐데 세계의 일부가 아닌 세계 밖이라고 얘기하면 뭔가 지나치게 초월적인 느낌이죠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자아는 바로 세계의 경계선이라고 합니다
세계의 경계선이라는 뜻이 모호할 수도 있지만, 철학적 자아의 한 가지 특징을 보면 약간 이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철학적 자아는 의지를 갖습니다 그리고 그 의지에 따라 세계는 다르게 보이고요
즉, 쉽게 말해 세계를 보는 관점의 역할을 수행하는 게 바로 철학적 자아라면, 그 관점의 방향성이나 태도가 바로 철학적 자아의 의지인 겁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예는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인데요
행복한 사람에게 세계는 행복한 곳으로 보이고, 불행한 자에게 세계는 불행한 곳이라는 말을 합니다
쉽게 말하면, 행복한 (의지) 관점 (철학적 자아)에서 보면 세계는 행복한 곳이고 반대는 반대라는 거죠
결국 인간은 사실을 바꿀 순 없지만, 그 사실들의 총체로서의 세계를 어떻게 볼 수 있는지는 각자에게 달려있다는 거죠
그리고 그렇게 보는 방식에 따라 세계는 한 번에 완전히 다른 곳으로 바뀌기도 한다는거고요
(실제로 가능한지는 모르지만요)
1.3
다시 사다리 차는 얘기로 돌아와보죠
논고를 다 읽은 사람들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포함한 모든 철학에서 벗어나야겠죠
하지만 중요한 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는 거겠죠
바닥에 가만히 서있는게 아니라 어쨌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고, 그 다음에 사다리를 차버리더라고 자신은 여전히 그 올라선 곳에 서있을테니까요
아마 위의 철학적 자아와 의지를 이해한 독자라면, 사다리를 차버리면서 '철학적 자아', '철학적 자아의 의지'라는 철학적 개념 자체는 버리더라도, 그것이 가르치는 바는 각자의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겠죠
그리고 그렇게 깨달은 이해에 따라 그 독자가 살아가는 삶은 달라질 수도 있을테고요
1.4
논고에 대해 하나만 더 말하고 요부분은 마무리하겠습니다
논고 후반부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인생의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은 시공간적으로 이해된 인생 안에서 발견될 수 없다
위의 '사실', '철학적 자아', '철학적 자아의 의지'와 연결시켜 보면 대략 이런 뜻이겠죠
인생의 수수께끼에 대한 대답은 어떤 사실을 가리킴으로써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대답은 사실의 총체로서의 세계를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철학적 자아의 의지를 바꿈으로써 얻을 수 있다
쉽게 말하면 이런 거죠
'난 어떤 삶을 살아야할까'라는 물음을 던지는 모습을 생각해보죠 그리고 이걸 인생의 수수께끼라고 해봅시다
그러면 이 수수께끼에 대한 대답이 단순히 어떤 사실을 가리키는 건 아니겠죠
가령, 우리는 인생의 물음에 대한 대답을 노트북의 두꺼움이나, 나무가 가진 나뭇잎의 개수나, 내 키나 몸무게 같은 걸 가리키는 식으로 대답하지 않겠죠
인생의 문제는 이런 사실들로 대답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사실들을 '어떻게' 볼 것인지, 어떻게 의지(will)할 것인지로 대답되어야하는 문제인거죠
가령, 내가 키가 아주 작은데 내가 태어난 세계는 키가 큰 사람들이 우대받는 세계라면, '이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야할까'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너는 키가 작아', '너보다 키가 작은 사람은 없어' 같은 사실이 아니라, 나의 작은 키를 어떻게 볼 것인지, 내 작은 키에 대한 사실을 통해 세계가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의지할 것인지, 이런 것들이 되어야한다는거죠
윌리엄 제임스
윤리학:
https://www.clien.net/service/board/lecture/15325722CLIEN
믿으려는 의지:
https://www.clien.net/service/board/lecture/15415994CLIEN
결정론의 딜레마:
https://www.clien.net/service/board/lecture/15460115?od=T31&po=0&category=&groupCd=CLIEN
비트겐슈타인
말할 수 있는 것:
데카르트
신존재 증명:
https://www.clien.net/service/board/regist?boardCd=lecture&boardSn=15462921&mode=updateCLIEN
건강 건학을 기원합니다.
어떤 책에서 읽었던 비트겐슈타인의 세계의 진리는 세계 안에 있지 않다 - 라는 말의 의미가 궁금했었는데, 이 글을 읽어보면서 어느정도 의문이 풀리는 것 같네요.
논리철학논고 책을 찾아봤는데 저서가 명제들을 죽 나열해놓은걸 보고 이해하기가 쉽지 않겠구나 느꼈었지요ㅎㅎㅎ
이런 질문을 드리는 것은... 사유의 메타적 재귀가 어디까지 가치를 인정 받을 수 있는 것인가가 궁금해서입니다.
굳이 따지자면,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식의 과학철학도 대상으로 삼는 철학을 한다고 봐야하지 않나 싶네요
답변 감사합니다.
1) 에 대해서는 과학철학을 포함하는 형이상학을 다루고 있다고 이해했습니다. 그러면 2) 의 대상과 방법에 대해서도 여쭤볼 수 있을까요?
그리고 세계의 경계선으로서의 철학적 자아가 쿠자누스의 대립을 통한 앎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방법론은 전기/후기 대략 두 가지로 구분되는데요, 대략적으로만 말씀드리면,
전기: 형이상학적 명제들의 의미없음을 보여주고 자연과학적 명제만이 의미있음을 보여줌
후기: 형이상학적 단어 사용을 일상언어적 사용으로 되돌림
라고 할 수 있습니당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의 대상은 당연히 형이상학 전체가 될테고요
둘의 공통점은, 철학은 기존의 철학적 문제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답을 주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게 아니라, 기존의 문제 자체가 "해소"될 수 있는 방식으로 전개되어야한다는 거고요 ㅎㅎ
(전기의 방식은 철학적 명제가 의미없다는 걸 보여줌으로써, 후기의 방식은 철학적 단어의 사용이 일상언어적 사용 위에 만들어진 모래성 같은 거였다는 걸 보여줌으로써)
감사합니다!
"인생의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은 시공간적으로 이해된 인생 안에서 발견될 수 없다"
초월한 지능(인공지능이나 외계인)에게서 정답을 들어도 역시 우리의 시공간적으로 이해된 인생 안에서 정답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것으로 생각해도 될까요?
말씀하신 우리의 '세계란 사실의 총체'라는 개념하고도 연결되는 것 같구요.
간단히만 말씀드리면 후기 비트겐슈타인에게는 삶의 형태(form of life)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근데 본인이 잘 설명하지 않아서 해석이 분분한데요.. 저 개인적으로 이해하기엔 일종의 우리의 삶의 사실적인 조건(de facto condition)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동물로서의 인간, 이성적인 존재로서의 인간, 구체적인 어떤 문명사를 갖고 있는 인간 등등 이런 구체적인 맥락 속에 인간이 태어나고 그 위에서 생각하고 살아가는, 그런 삶의 형태가 있다고 보는건데요
외계인이나 AI는 인간과 그런 삶의 형태를 공유하지 않겠죠 따라서 아마 그들이 그들 나름대로의 진리를 말해준다고 해도 인간과 다른 삶의 형태를 갖기 때문에 우리에겐 와닿지 않을 수가 있겠죠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