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쉽게 설명하려고 나름 노력하지만 언제나 실패하는듯한 대학원생입니다
철학에 대해 약간이라도 지식이 있으신 분들은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이름에 익숙하실 겁니다
인간 자체가 흥미로운 인간이기도 했고, 그의 전기와 후기 철학 모두 철학사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20세기 초반 철학의 상징적인 인물처럼 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철학의 대표격인 논리철학논고 (논고)와 후기 철학의 대표격인 철학적 탐구에 대해 대략 두 가지 접근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전기 철학은 논리실증주의의 전형으로 이해하되, 후기 철학은 논리실증주의를 벗어난 것으로 보는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전후기 철학 모두 논리실증주의적이지 않으며, 논리철학논고는 그의 후기철학과 일관된 것으로 읽어야한다고 보는 관점입니다
이런 다양한(?) 해석을 불러일으키는 이유 중 하나는 그의 논고 마지막 명제들 때문인데요
저의 미천한 지식에도 불구하고 한 번 아주 간략하게 논고의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하는 부분들을 건드려볼까 합니다
1. 논고의 구성
논고는 총 7가지 핵심 명제와 수많은(?) 하위명제들로 구성됩니다
7가지 핵심 명제는
1. 세계는 일어나는 일들의 총체다
2. 일어나는 일 (사실)은 사태의 존재다
3. 사실들의 논리적 그림이 생각이다
4. 생각은 의미가 있는 명제다
5. 명제는 요소 명제들의 진리함수다
6. 진리함수의 일반적인 형식은 ~~와 같다 (기호가 들어가는데 여기서는 별로 안 중요해서 생략합니당)
7.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우리는 침묵해야한다
제 전공지식이 미천하기도 하고, 논리실증주의를 설명하는 게 목표가 아니다보니 중간쪽 명제들은 생략하고 제일 앞쪽과 제일 뒤쪽의 명제만 전달해보려 노력하겠습니다
2. 약간의 배경 설명
비트겐슈타인을 논리실증주의자로 읽는 이유는 '그림 이론'이라는 그의 진리이론 때문입니다
이걸 설명하기 전에 더 기초적인 배경을 간단하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a) 진리
일반적으로 철학 바깥에서 '진리'에 대해 얘기할 땐, '진리인 명제들'을 의미하곤합니다
가령, 지구는 둥글다, 인간은 포유류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등등이요
하지만 언어철학이나 인식론에서 얘기하는 진리는 그런 구체적인 '진리인 명제들'을 의미하지 않고, 어떤 명제가 갖는 상태로 이해합니다
가령, "지구는 둥글다"라는 명제가 존재하고, 실제로 지구가 둥글 경우, 저 명제는 '참'이라는 상태를 갖는 거죠
만약 그 반대라면, '거짓'이라는 상태를 갖겠죠
(상태라는 말이 어색하시면, 우연적인 성질 정도로 이해하셔도 좋습니다)
b) 명제
앞서 '"지구는 둥글다"라는 명제'라고 언급했지만,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죠
"문장이랑 명제랑 뭐가 다르냐"
결론부터 얘기하면 문장은 명제를 표현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굳이 둘이 다른 이유는, 문장은 구체적인 언어 기호로 구성된 실재에 해당하는 것이고, 명제는 추상적인 대상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참이거나 거짓인 것은 문장이 아니라 명제인 이유는, 문장은 단지 기호들의 조합에 불과한 것이지 아무런 내용이 없기 때문이죠
3. 그림 이론
그림이론은 비트겐슈타인의 진리이론인데요, 어떤 명제가 실재의 그림일 경우, 그 명제는 참이라는 걸 핵심으로 갖는 이론입니다
굉장히 직관적이죠
"지구가 둥글다"라는 문장이 표현하는 명제가 실재를 똑같이 그리고 있다면, 그 명제는 참인겁니다
그럼 이걸 조금만 구체적으로 보죠
a) 세계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세계는 사실(fact)들의 총체입니다
사실들이란 사태(state of affairs)를 의미하고요
사태란 간단히 말해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결국 사실이란 일어나고 있는 일을 가리키는 거겠죠
중요한 건, 사태와 대상(object)은 다르다는 겁니다
보통 세계는 인간, 동물, 자연물, 무기물 등등 이런 구체적인 대상들로 구성되었다고 생각하죠
비트겐슈타인의 관점에서, 세계는 그런 구체적인 '대상'들 그 자체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인간이 '대상들이 존재하는 상태'를 받아들인 대로 존재합니다
혹시라도 칸트의 물자체 개념에 익숙하신 분들은, 인간에게 있어 세계는 물자체의 세계가 아니라, 그런 물자체들이 존재하는 상태를 인간이 받아들인 대로 존재하는 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사태의 역할이 바로 그건데요,실재(reality)를 물자체라고 보는 게 아니라, 실재란 인간이 보기에 '이러저러하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고 이해하는 겁니다
(제 설명이 매우 구린 것 같은데요, 더 간단히 얘기하면 우리는 인간의 인식범주를 넘어서는 것들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고도 무엇이 옳은지 틀린지에 대해 얘기할 수 있다는 겁니당..왜냐면 우리는 대상/물자체에 대해 얘기하는 게 아니라, 이들이 인간에게 드러나는 사태를 통해 실재를 얘기하는 거니까요..)
b) 그림
풍경화를 떠올려봅시다
그 풍경화가 특정 지역의 풍경의 정확한 묘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아마 그림의 요소들이 실제 그 지역의 존재들과 일대일 대응이 되면 되겠죠
나무가 있으면, 나무가 똑같이 존재하고, 호수가 그러져있으면 호수가 실제로 있고 등등
비트겐슈타인이 볼 땐, 어떤 명제가 참이란 것은 그 명제의 부분들이 가리키는 대상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지구는 둥글다"의 경우, 지구가 존재하고, 그 지구가 둥글면, 저 명제는 실재를 잘 그리고 있으므로 참이죠
c) 유의미/무의미
여기서 논리실증주의적인 임시결론이 나옵니다
만약 어떤 명제가 그림 그리는데에 실패했다면, 즉, 실재를 그리지 못했다면, 그 명제는 거짓이겠죠
근데 그림 그리는데에 실패한 것은 두 경우가 있겠죠
하나는 뭔가를 그렸고, 그 명제에 대응하는 실재와 일치하지 않는 경우,
다른 하나는 뭔가를 그린 것처럼 보였는데, 그 명제에 대응하는 실재가 아예 없는 경우
(현실이 아닌 가능할 뿐인 사태를 묘사하는 경우가 아니라, 그런 사태 자체가 아예 없는 경우)
전자는 단순히 틀린 것이지만
후자는 무의미합니다
예를 들어보죠.
"지구는 삼각형이다"라는 명제는 그냥 거짓인 명제죠, 왜냐면 대응하는 실재(지구의 형태)와 일치하지 않으니까요
"살인을 하면 안된다"라는 명제는 무의미합니다, 왜냐면 대응하는 실재가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지구가 둥글다, 풀은 녹색이다, 내 키는 몇 센치다, 이런 명제들은 현실 속에서 발견되는 대상들을 묘사하죠
지구를 관찰하거나, 풀을 관찰하거나, 키를 재보면 그냥 발견되니까요
하지만 윤리적, 예술적 명제들은 아무리 찾아봐도 위와 같은 명제들이 묘사하는 사실과 같은 것을 찾을 수가 없죠
따라서 유의미한 명제들은 오직 자연과학적인 명제들 밖에 남지 않습니다
자연과학에서 설명할 수 없는 명제들은 거짓인 게 아니라 그냥 아무런 의미가 없는 명제인거죠
쉽게 말해, 윤리적/예술적 문장들은 마치 의미가 있는 것처럼 구성된 문장이지만, 단지 규칙적인 소리와 글자의 배열에 불과한 거였던 거죠
(참고로 이 관점이 50년대부터 유행했던 emotivism으로 이어집니다.. 간단히 말해, 윤리적 명제는 단지 태도를 표현할 뿐이라는거죠. 따라서 '살인하면 안된다'라는 말은 단지 '살인? 우우우우~~' 이렇게 살인에 대해 야유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거죠)
4. 반전?
여기까지가 바로 '말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근데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완벽한 논리실증주의 이론인데, 비트겐슈타인은 몇 군데에 지뢰를 숨겨둡니다
몇 개만 꺼내서 감상해보죠
일단 본인이 직접 쓴 서문 일부 (약간의 의역들이 들어가있습니당)
"따라서 이 책의 목표는 생각의 한계를 긋는 것이다. 아니면 생각이 아니라 생각의 표현들의 한계를 긋는 것이다. 왜냐면 생각의 한계를 긋기 위해선, 그 한계의 안쪽과 바깥 쪽 모두를 생각할 수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생각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생각할 수 있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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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22 실제로 말로 표현될 수 없는 대상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자기자신을 구체화한다 (They make themselves manifest). 그들은 바로 신비로운 것들이다 (They are what is mystical).
6.54 내 명제들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명료화 작업을 수행한다: 누구든지 내 명제들을 마치 내 명제들을 뛰어넘기 위한 계단으로 사용한다면, 그는 내 명제들이 의미없다(nonsensical)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는 내 명제들을 올라선 뒤에, 그가 타고 온 사다리를 버려야한다)
그는 이 명제들을 초월해야한다. 그리고나서 그는 세계를 올바르게 볼 것이다.
7.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우리는 침묵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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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7은 마지막 명제, 6.54는 마지막에서 두번째 명제, 6.522는 마지막에서 네번째 명제입니다
이렇게 보면 뭔가 이상하죠 보통 책의 후반부에 핵심적인 생각이 들어간다는 걸 고려하면, 앞에서 실컷 논리실증주의자들 듣기 좋은 말을 하다가 책의 말미에서 갑자기 니들이 지금까지 타고온 사다리를 버려야 진짜로 세계를 올바르게 볼 수 있다고 하니까요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논리철학논고의 핵심은 논리실증주의적인 부분이 아니라 이 책이 말하지 않은 것들, 이 책이 선을 그음으로써 '말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 것들이라고 봅니다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논리실증주의의 대표집단인 비엔나 써클에서 비트겐슈타인을 초대했을 때, 비트겐슈타인은 토론에 안끼고 시집이나 꺼내서 읽었다고 하죠
일부는 비트겐슈타인이 단지 신비주의적인 여지를 남겨두고자 했을 뿐이라고 하기도 하고요
저는 정치철학도라서 이쪽 전공은 아니지만,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의 철학은 이런 파고드는 맛이 있지 않나 싶네요
다음에 시간되면 말할 수 없는 것들은 그럼 무엇이냐는 걸 한 벝 겉핥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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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제임스에 대해 올린 두 편도 링크 올려드립니다
엄청 재밌진 않아도 나중에 다 모아서 보면 재밌을지도 몰라요...
https://www.clien.net/service/board/lecture/15415994CLIEN
https://www.clien.net/service/board/lecture/15325722CLIEN
논고 원서가 아직도 책장에 있지만 엄두를 못 내고 있습니다 ㅠㅠ
좋은 설명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기대합니다...!
원래 인터넷에 글 잘 안쓰는데 코로나로 맨날 집에만 있다보니 너무나 심심해서 앞으로 종종 올려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당
앞부분을 읽으며 생각이 든 것입니다만,
비트켄슈타인은 경험과 인식을 중시한 것 같다는 생각이듭니다.
자기 경험을 기초로 하여 ~와 같다는 진리함수의 일반적 형식이 만들어지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이를 명제화하고, 그것을 판단의 기초로 하여 반복될 때 인식이라는 틀이 만들어지고
이러한 '경험을 시작으로 인식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존재하지 않는 것들은
언어로 명제화할 수 없으니 '말할 수 없는 것'이 되고
그러므로 우리는 침묵해야한다고 말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맨 앞에 번호대로 정리된 것에 경험이라는 개념이 없어서 혼자서 좀 당황했습니다.
정리된 글을 쓰셨는데,
두서없는 댓글이 혼란을 만들지나 않았나 걱정입니다.
저도 제 이야기를 정확하게 이해는 못하겠네요.ㅜ.ㅡ
그런데 말할 수 없거나 인식할 수 없는 것들은 결국 경험을 통해 추론하기 어려운 것들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또한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생각, 인식해야 한다고 하는 것의 경계까지 밀고나가게 해주는 것이 기존의 경험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래서 그 경험에서 추론 유추되기 어려운 것들은 알 수 없으니 말할 수 없다고 한 것이 아닐까 그냥 혼자 정리해봅니다. 어차피 보이는 것, 겪는 것에 묶인 경험주의적인 접근법이기는 합니다만, 그래서 그렇지 않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제 기준에서는 자꾸 경험이라는 논리적 블랭크가 보여서요. 아마도 제가 경험주의적 접근법에 쩔어 있어서 그런가 봅니다.
개인적으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유언으로 완성된게 아닌가 싶습니다.
Tell them I've had a wonderful life.
전쟁일기 16년 7월 8일에 이런 구절이 나오죠.
현재를 사는 삶에는 죽음이 없다. 죽음은 삶의 사건이 아니다. 죽음은 세계의 사실들 중 하나가 아니다. 영원을 무한히 지속되는 시간이 아니라 비시간성으로 이해한다면 현재 속에 사는 자가 영원히 산다고 할 수 있겠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나는 세계와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행복하다는 말의 의미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거짓된 삶, 즉 나쁜 삶의 가장 좋은 징표다. 행복하게 살아라.
비트겐슈타인의 행복의 정의인데, 이후 논리철학논고를 보면 이러한 생각을 강화하는 모습을 보여주죠.
5.6 나의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5.621 세게와 삶은 하나다. 5.63 나는 나의 세계이다. 5.632 주체는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세계의 한계이다.
죽음은 우리의 삶에서 경험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므로 이에 대한 공포를 느끼는 삶은 나쁜 삶이라고 이야기한 것이죠.
같은 의미에서 '삶의 의미'나 '종교', '이데아'와 같은 형이상학적 개념들 역시 삶 안에서 경험할 수 없는 일들이죠. 이런 것들을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논하는 것은 세계와 일치할 수 없는 삶(결코 충족될 수 없는 삶)이므로 그런 것에 대해 논하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죠.
6.54 내 명제들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명료화 작업을 수행한다: 누구든지 내 명제들을 마치 내 명제들을 뛰어넘기 위한 계단으로 사용한다면, 그는 내 명제들이 의미없다(nonsensical)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는 내 명제들을 올라선 뒤에, 그가 타고 온 사다리를 버려야한다)
그는 이 명제들을 초월해야한다. 그리고나서 그는 세계를 올바르게 볼 것이다.
이 명제는 그런 의미에서 지금까지 서술해온 자신의 사상조차 '말할 수 없는 것', 의미 없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면서 논고는 완성되었습니다. 논고의 명제들은 세상을 올바르게 바라보는 시야를 얻기 위한 도구일 뿐이고 그것이 하나의 진리가 되지 않음을 밝힌거죠.
개인적으로 전기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형이상학적 개념에 매몰되는 것이 아닌 우리의 삶 속에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들에 집중하는 삶을 행복한 삶이라고 정의했다고 생각하고 저는 이러한 사상이 마음에 들어서 현재 삶에 충실한 것을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비전공자의 개인적 해석인지라 공신력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지만, 간만에 보는 그리운 이름에 댓글 남기고 갑니다.
(그는 내 명제들을 올라선 뒤에, 그가 타고 온 사다리를 버려야한다-->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아라. 내를 건넌 나그네가 나룻배가 고맙다고 등에 지고 산을 오르랴..... 아함경인가... 불경에서 본 듯한 내용이네요. 저도 예전에 비트켄슈타인 글을 조금 읽으며 불교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꿈만 꾸고 바로 접었던 게 '언어심리학; 심리언어학, 언어철학' 뭐 그런 쪽이어서 자꾸 보게 되네요. 제가 학교 다닐 때는 버클리 대학이 이쪽이 괜찮았다는 아주 짧은 지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돈이 문제라 바로 접고 취업했지요.
러시아 비코트스키도 한참 좋아라했었습니다.... 비운의 비코트스키....
대개 "'모르면 닥쳐', 기분나쁘다고? 이거 비트겐슈타인이 한 말이야" 이런 느낌으로 인용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ㅋㅋㅋ
그러나 영문위키피디아ㅠㅠ
일단 영어공부부터군요.ㅎㅎ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의 한계가 생각(세계)의 한계이다 라는 말이 유명한데 실제로 비트겐슈타인이 그리 이야기를 한것이 맞는지, 그리고 표면적인 의미 말고 혹시 문장 뒤의 맥락이라던지 배경에 대해 설명 부탁 드려도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