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초 덴마크 3위 은행인 유스케가 세계 최초로 마이너스(-) 0.5%의 고정금리를 매기는 10년 만기 주택담보대출을 출시했다. 이 경우 마이너스 금리라고 은행이 고객에게 이자를 주는 건 아니다. 만기 때 상환할 돈이 당초 꾼 돈보다 줄어든다는 의미다. 예컨대 1억원을 빌렸다면 10년간 이자(500만원)를 빼고 9500만원만 갚으면 된다. 그렇다고 유스케 은행이 손해를 보진 않는다. 덴마크의 채권 시장 금리는 -0.6% 수준이다. 유스케가 마이너스 금리 채권으로 자금을 조달하면 대출 금리와 시장 금리의 차이인 0.1%포인트만큼 이익이다. 게다가 유스케는 750만크로네(약 13억5000만원)가 넘는 예금주에게 이자는 한 푼도 주지 않고 오히려 보관료 0.6%를 받기로 했다. 예금에도 마이너스 금리를 적용하는 것이다. '마이너스 금리' 세상에서 벌어지는 희한한 일이다.
글로벌 경기 침체가 가시권에 들어오면서 유럽을 중심으로 이처럼 마이너스 금리 영역이 확장되고 있다. 28일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27일 기준 전 세계에서 마이너스 금리로 거래되는 채권은 16조7790억달러(약 2경370조원)어치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마이너스 금리 채권은 투자자들이 웃돈을 주고 채권을 사는 것이다. 10년 만기 때 1억원을 받는 -0.5% 금리의 채권은 원금에 10년간 이자인 500만원을 웃돈으로 주고 1억500만원에 사는 식이다. 이날 마이너스 금리 채권이 전 세계 채권액(56조4610억달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9.7%로 지난 15일 기록했던 사상 최고치(29.8%)에 육박했다. 전 세계 채권 중 30% 가까이가 마이너스 금리에 거래되는 것이다.
◇마이너스 금리 채권 1년 만에 배로 늘어
마이너스 금리 채권은 1년 전만 해도 7조7000억달러 규모였다. 1년 사이에 배로 늘었다. 마이너스 금리 채권이 불어난 것은 글로벌 경기 침체로 앞으로 금리가 더 낮아질 것이란 전망 때문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세계 경제성장률을 3.2%로 내다본다. 2009년(-0.1%) 이후 가장 낮다. 특히 유럽이 근심거리다. 유럽 1위 경제 대국인 독일은 2분기(4~6월) 성장률이 -0.1%를 기록했다. 유럽연합(EU)은 작년 1.9% 성장했던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로존(유로 사용 19개국)이 올해는 1.2% 성장에 머무를 것이란 전망을 하고 있다. 미·중 무역전쟁으로 중국의 성장률도 하락세고, '나 홀로 성장' 중인 미국도 장·단기 금리가 역전되면서 내년쯤 경기 침체가 온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유로존을 관장하는 유럽중앙은행(ECB)이 2014년 6월 마이너스 금리 정책을 도입하기 전까지만 해도 마이너스 금리 채권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유럽 재정 위기에 대응해 돈을 풀기 위해 ECB가 예치금 금리를 -0.1%로 낮추자 마이너스 금리 채권이 늘어났다. 이 금리는 은행이 ECB에 돈을 맡길 때 적용하는데, 마이너스가 되면 은행들이 ECB에 돈 보관료를 내야 한다. 은행들이 여윳돈을 ECB에 넣으면 보관료를 받으니 예금하지 말고 소비, 투자를 진작하는 데 쓰라는 것이다. 최근 ECB 예치금 금리는 -0.4%까지 낮아졌다.
마이너스 금리여도 투자자들이 채권을 사는 덴 이유가 있다. 지난 2월 루이비통 등 명품 브랜드를 가진 프랑스의 LVMH가 -0.017%에 3억유로의 채권을 발행하자 투자금이 26억유로나 몰렸다. ECB에 돈을 넣어 0.4%의 보관료를 뜯기느니 마이너스 금리라도 투자하겠다는 것이다. 앞으로 금리가 더 떨어진다면 지금 채권을 사는 게 이득이기 때문이다. 독일 국채 같은 안전자산은 누구나 갖고 싶어 하기 때문에 마이너스 금리라도 수요가 많다.
◇마이너스 금리 채권, 더 늘어날 수도
ECB는 지난달 경기 둔화에 대응해 추가로 금리를 더 낮출 수 있다고 시사했다. 스위스와 덴마크는 각각 -0.75%, -0.65%인 기준금리를 내년에 -1%로 내린다는 전망이 나온다. ‘나 홀로 호황’인 미국에서도 경기 침체가 가시화되면 마이너스 금리 정책이 등장할 수 있다. 앨런 그린스펀 전 연방준비제도 의장은 최근 “미국 국채 금리가 제로(0) 금리 아래로 떨어질 수 있다”며 “제로 금리라는 건 어떤 숫자라는 것 외에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추세라면 글로벌 침체에 따라 당분간 마이너스 금리가 세력을 넓혀갈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