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거리 혹은 결말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요즘 나는 우리나라 소설을 읽지 않습니다. 유심히 보지 않아 그런지 몰라도, 제 눈에는 지금 우리나라 소설은 두 종류밖에 보이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중견 남성작가가 쓴 역사소설과 젊은 여성작가들이 쓴 힐링 판타지 혹은 유사SF 소설들입니다. 게다가 주로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단편이나 짤막한 연작들이고 장편소설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작가들의 근력이 모자라서일 수도 있겠지만 시대가 짤막한 힐링을 원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문학적으로 깊이가 얕은 나는 중견작가가 쓴 대중소설, 장편소설을 좋아합니다. 학교 다닐 때 책을 좀 읽는 편이긴 했지만 순문학보다 최인호, 이문열, 김홍신 등의 소설을 탐독했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그런 작가들의 책들이 서점가에서 사라지고 난 후 한국소설을 외면했었는데, 얼마 전 신작 리스트에서 중견작가의 장편소설인 이 책을 보고 관심도서 목록에 올려두었습니다. <압구정동에는 비상구가 없다>을 썼던 이순원 님의 소설이고 제목은 <박제사의 사랑>, 분류는 '추리, 미스터리'로 되어있습니다. 박제사와 미스터리라..... 순간 이거 혹시 슬래셔, 고어인가? 했지만 책의 내용 중에 그런 불상사는 없었습니다.
박제를 업으로 삼고 있는 중년 남자가 있습니다. 이 소설은 그의 아내가 갑자기 자살하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아내가 자살 당시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진 임신 상태였다는 것이 주인공에게 또 다른 충격이었고, 진실을 향해 한 걸음씩 들어간다는 것이 이 소설 도입부의 내용입니다. 다소 자극적일 수도 있지만 하지만 지금 세상의 콘텐츠들에 비하면 평범한 수준의 충격이라고나 할까... 그나마 초반 이후부터는 그야말로 '평온한 미스터리 소설'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전혀 자극적이지 않고 매우 담백합니다. 나는 좋았지만 다이내믹한 액션과 스릴, 시청자의 감정선을 극단으로 몰고 가는 요즘 넷플릭스의 한국 드라마 같은 것들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심심함이 있을 것입니다. 역시 60줄에 들어선 중견 작가의 글에는 민들레 홀씨 흩날리는 듯한 가벼움 따위는 없었고, MSG 듬뿍 친 유려한 문장의 가식들도 없었습니다. 스토리도 주인공 박제사 '박인수'의 성격처럼 묵직하고 진중하게 진행됩니다. 작가님께서 사전에 공부를 무척 열심히 하셨다던데, '박제사'라는 직업과 작업에 대해 꽤 심도 있게 쓰여 있으며 낯설었던 그 세계가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결말과 반전에 목숨 거는 요즘 미스터리들과 다르게, 결말이 그다지 충격적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렇다고 그렇게까지 하나?"라고 느껴지기도 했던, 나에게는 살짝 부족하게 느껴졌던 개연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매우 좋은 독서였습니다. 작가 본인이 스스로 극구 이 책은 미스터리 장르라고 하지만 작중에 피 한 방울 등장하지 않고, 출생의 비밀도 없고, 우울증 걸린 형사도 없고, 애정결핍으로 인한 연쇄살인 같은 것도 없었으며 심지어 그 흔한 애정행각 묘사 한번 등장하지 않습니다. 한동안 외국 스릴러를 꽤 많이 읽었는데, 맨날 비빔면, 짬뽕만 먹다가 맑은 국물의 잔치국수 한 그릇 먹은 듯한 느낌입니다. 모든 게 친숙한 우리 주변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바다 건너 외국 사람들의 이야기와는 확연히 다른 친숙한 감정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잔잔한 문체로 우리 주변의 미스터리를 소재로 쓴 소설을 한번 읽어보고 싶으신 분들께 일독을 추천합니다.
흔하지 않게 나오는 이런 책들은, 나 같은 독서가라면 좀 사줘야 된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나는 사지 않고 빌려봤습니다. 다른 책을 빌리러 집 앞 동네 도서관에 갔다가, 사기 전에 앞부분만 조금 읽어보자... 하고 함께 빌려왔는데, 이야기가 궁금해서 결국 훌렁 다 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앞으로 또 열심히 쓰시겠다고 하니, 다음에 나오는 작가님의 책은 꼭 사서 읽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