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구입한 이유는 딱 한 가지였습니다. <모비딕>의 맨 앞장에 쓰여진 '이 책을 너대니얼 호손에게 바친다'라는 글 때문이었습니다. '허먼 멜빌'이 존경해 마지않는, 그 외에도 많은 저명한 미국 작가들도 함께 칭송하는 작가의 글이라면 한 편 읽어봐야 하지 않겠냐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자타 공인 '너대니얼 호손'의 대표작은 <주홍글자>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을유문화사 세계문학전집 <주홍글자>를 구입했습니다. 나는 평소에 을유의 세계문학전집을 선호합니다. 민음사 세계문학 고전들의 구태의연한 번역, 싸구려틱한 장정에 비해 책에 무척 공을 들인 느낌이라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얼마 안 읽어 매우 실망이었습니다. 최근 몇 년간 읽었던 책 중에 가장 거지같은 번역이었습니다. <주홍글자>에는 거의 단편소설 분량의 서문이 들어가 있습니다. (민음사판에는 엉뚱하게도 서문이 맨 뒤에 있습니다) 서문인 주제에 제목도 있습니다 - <세관>. 을유의 이 서문을 읽자니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도 답답해서 인터넷에서 <주홍글자>의 영문 원본을 다운받아 봤습니다. 영알못 한국인이 영문본은 이해가 되고 한글본은 이해가 안되는 시추에이션을 경험했습니다. 을유꺼는 즉각 팔아버리고 다시 교보문고에 가서 여러 출판사의 서문을 읽어본 뒤, 가장 마음에 들었던 열린책들의 <주홍글자>를 새로 구입해서 읽었습니다.
다 읽고 난 지금의 느낌은 '내가 왜 이 책에 두 배의 책값을 들여 발품도 팔아가며 스트레스를 받았을까...'입니다. 솔까 돈아깝고 발품도 아까웠다는 이야기입니다. 개인적인 평가로는, 남들이 명작이라 하는 것은 이해하겠지만 나의 명작들 리스트에 올리지는 않겠습니다. 외국의 권위 있는 유수의 기관들이 선정한 필독도서 목록에서 이 책을 찾아보기 쉽지 않은 이유를 알 것도 같습니다. 호손은 글을 무척 잘 씁니다. 소설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나 등장인물들 간의 대화를, 마치 현장에서 한 발짝 떨어져 유심히 지켜보면서 가용한 모든 표현, 미사여구들을 동원해가며 독자들에게 말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확실히, 작가를 모르더라도, '모비딕의 작가는 주홍글자의 작가로부터 영향을 받았구나'하는 느낌도 가능할 것입니다. 19세기 영미문학 특유의 그 만연체가 만연했지만 산만하거나 장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작가의 철학과 세계관에 공감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내용은 그다지 와닿지 않았습니다. 이 책은 매우 기독교적이고 동시에 서양의 그 '나'중심주의적 문화의 책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죄에서 용서는 피해자가 아닌 하나님이 하는 것이고,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나의 불륜으로 인한 너의 슬픔도, 내가 아닌 하나님이 주신 시련이라 네가 감당해야 할 운명입니다. 심판도 하나님의 몫이며, 소설의 결말도 그렇습니다. 두 남자 주인공, '딤스데일'과 '칠링워스'를 두고 작가의 외모관을 엿볼 수 있었고, 중년남 작가가 쓴 '헤스터'의 어린 딸 '펄'의 대사에는 마치 70년대 한국 방화에서 아역들의 대사를 성인 성우가 더빙했던 그 비현실적인 어색함이 있었습니다.
서문 <세관>이 더 흥미로웠습니다. 사실 본편 <주홍글자>보다 이 서문에서 호손의 문학적 감수성과 유려한 글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서문을 읽고 본편 소설에 대한 기대감이 고조되었기 때문에 나중에 실망감이 더 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문학은 시대상입니다. 17세기 영국 식민지 시대의 청교도 문화를 바라보는 19세기 미국 작가의 시각이 흥미로웠고, 여성이 억압받던 시대, 사랑받고 아름다웠던 어린 시절의 가녀린 소녀가, 작가의 표현대로, 여성스러움과 예쁜 외모를 다 잃어버리지만 더 인간적이고 강인한 모습으로 변해가는 '헤스터'라는 캐릭터도 인상적이었습니다. 19세기 고전문학에서 찾기 쉽지 않은 여성상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