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 인스타, 블로그 등 SNS라 불리는 새로운 형태의 매스컴이 대중화되면서, 책 정보나 서평을 뒤져보며 느끼는 점 중에 하나는, 책을 보는 관점이 소위 대형 인플루언서들의 관점에 맞춰 획일화되는 경향이 있다라는 점입니다.(잘못됐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1차 세계대전 승리 후 경제적 문화적으로 폭주하던 미국의 1920년대, 'Roaring 20's나 'Jazz Age'라고 칭송받던, 그 화려함 속에서 흥청망청하지만 때로 그 그늘에서 방황하던 젊은이들의 사랑과 갈등을 그린 작품, 거기에 살았던 피츠제럴드의 삶이 투영된 필연적 소설이라는 것이 <위대한 개츠비>에 대해 소셜네트워크를 지배하는 관점인 듯합니다. 아마 정확한 관점일 것입니다.
대학생 때 읽었던 이 책을 2~30년 만에 다시 읽은 계기는, 유튜브에 유명 인문학 작가가 올린 이 책의 리뷰가 알고리즘에 떠서 그걸 열심히 봤더니, 며칠 후에는 두세 개의 리뷰가 더 뜨길래 그것도 보고 책도 한 번 더 읽어보자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리뷰의 내용은 비슷비슷하게 제가 위에 언급한 내용들이었습니다. 책과 깔맞춤하며 아르데코향 뿜뿜대는 수려한 비디오 편집과 자막, 원어민 발음에 가까운 전문용어로 막힘없이 설명하는 영상들은 나를 멍하게 지켜보게 했지만 딱히 구독과 좋아요를 누르지는 않았습니다.
옛날에 읽었던 다른 책들의 내용을 다 까먹었어도, 그때의 절절했던 기분이 이제는 가물해도, 이 책의 내용을 나름 꽤 많이 기억하는 이유는 첫사랑의 실연 후 얼마 되지 않아 읽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의 배경이 1920년대인지 70년대인지는 중요하지 않았고 1차 세계대전이 미국 경제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그것이 청춘남녀들의 삶과 문화를 어떻게 바꾸었는지, 피츠제럴드가 '닉 캐러웨이'처럼 시골에서 뉴욕으로 이사 와서 돈도 많이 벌고 '제이 개츠비'처럼 한동안 펑펑 쓰며 살았다든지 하는 작가의 인생도 알지도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펴고 새벽녘까지 단숨에 읽어버렸던, 책을 덮으며 담배 한 개비 깊이 들여마시고 아침까지도 여운에 절여져 쉬이 잠들지 못했던 기억을 아직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책의 제목은 <위대한 개츠비>지만 사실 위대한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입니다.
스물 무렵의 개츠비가 첫사랑 데이지를 잃어버렸던 스토리는 낯설지 않으며 동질감까지 불러일으킵니다. 좋은 학교를 다니던 그 부잣집 아들녀석한테 가버린, 혹은 군대 가있는 동안 옆자리에서 챙겨주던 복학생 오빠한테 넘어간, 혹은 남친과의 고민을 상담해 주던 교회오빠 품에 안겨버린 여자친구들은 100년이 지난 지금 이 땅에도 넘쳐나고 나에게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첫사랑 그녀가 가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매몰차게 남자를 버렸던 그녀를, 훗날 위대한 성공 후 우연히 재회하는 상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첫사랑의 실연을 가진 모든 남자들의 영원한 로망이자 오래전부터 동서양 문학에서 무수히 차용되었던 이야깃거리였기도 합니다.
중년남이 되어서 다시 읽은 이 책도 여전히 재미있었습니다. 기억에서 잊혀져 새로운 부분도 많았고, 예전에 읽었을 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알고 있는 지식으로 인해 기억나던 부분에서도 다른 면을 볼 수 있었습니다. 닉 캐러웨이의 직업이 증권사 직원이었다는 점도 새로웠고, '증권사 직원이라는 놈이 이렇게 한가하게 싸돌아다니면서 어떻게 실적을 내겠냐'라고 속으로 궁시런거리던 나의 모습에서 내 자신이 닳고 타락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였는지 첫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한 저릿한 아련함도 희미했습니다.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문장과 표현은 그때보다 더 아름답게 다가왔습니다. 역시 피츠제럴드는 위대한 작가입니다.
인터넷, 스마트폰, 코로나, 비트코인, PC(정치적 올바름) 등등 우리는 지금 1920년대의 미국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격동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한가운데 서있는 우리는 잘 못 느끼지만 후세는 우리의 시대를 그렇게 평가할 것입니다. 피츠제럴드의 소설이 그러했듯이, 지금 쏟아져 나오는 문학 작품 중에, 지금은 세상이 몰라주는 어떤 책이 우리의 시대를 반영하는 명작이 될지 궁금해집니다. 3년 후 면 이 소설이 나온 지 딱 100년이 됩니다. 이런저런 이야깃거리가 꽤 있을 것이고 멋진 리커버도 발간될 터이니 한 권 또 사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