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핑계로 한동안 독서를 멀리하다가 오랜만에 책을 집었습니다. 책이 무거웠기 때문에 '집었다'는 표현보다는 '들어올렸다'는 표현이 더 적당할 겁니다. 책 좀 읽는다는 사람이면 한번 읽어야 한다는 <모비 딕>, 다른 고전이나 인문학 책을 읽다 보면 무수히 언급되고 레퍼런스로 등장하는 책이라 오래전부터 '읽어야 할 책' 리스트 상단에 늘 올려두었던 책이었습니다. 읽지 않은 이들에게도 이 책의 줄거리는 꽤 알려져 있습니다. 책의 분량에 비해 줄거리는 상대적으로 단순하기 때문이기도 할 겁니다. 거대한 흰고래에 대한 집착을 넘어 광기에 사로잡힌 '에이해브'라는 선장을 중심에 두고 그 유명한 스타벅, 퀴퀘그 같은 선원을 태운 배, '피쿼드호'의 여정을 '이스마엘'이라는 선원(사실상 작가 멜빌 본인)의 1인칭 시점으로 쓰인 작품입니다. '소설'이라는 장르에서 가장 중요한 덩어리가 '서사'일진대, 그 서사는 대략 전체의 1/3 정도밖에 되지 않으며 절반이 훨씬 넘는 분량이 고래에 대한 설명, 고래잡이, 포경선, 포경업에 대한 설명이 백과사전보다 더 디테일한 레벨로 채워져 있는 책입니다. 그래서 읽기가 버거운 책으로 유명하기도 합니다. '르포르타주'라는 문학의 장르가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입니다 (조지 오웰이 스페인 내전 중 카탈로니아 반군에 자원입대하여 겪은 전쟁 이야기). 이 책도 작가가 고래잡이배에 지원하러 낸터킷이라는 도시로 향하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구직, 준비, 승선, 여정, 고래사냥, 귀환에 대해 상세히 기록한 거대한 르포르타주에 가까울지도 모르겠습니다.
등장인물들은 매우 강한 캐릭터를 가지고 있으며 매력적입니다. 단 한 사람도 비슷한 사람이 없습니다. 심지어 출항 준비 때 잠깐 등장하는 선주의 여동생까지도, 잠시 설교하러 한 장면에 등장하는 목사까지도 정말 매력적인 캐릭터입니다. 대사와 대화는 시적이고 연극적입니다. 에이해브의 독백, 스타벅과의 대화는 마치 소포클레스의 비극이나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대사를 보는듯한 느낌마저도 납니다. 또한 중간중간 선원들의 마치 합창하는듯한 운율의 대사들은 오페라의 리브레토를 읽는 듯한 느낌도 줍니다. 작가의 거대한 인문학적 소양을 기반으로, 고전이나 성경에서 가져오는 방대한 인용구들은 작품의 무게를 더해줍니다. 고전의 힘을 느끼며 읽어나갔습니다.
이 작품은 인간과 거대한 자연의 대결을 소재로 합니다. 보다 정확히는 작가가 자연, 괴물(?)을 정복하려는 인간의 투쟁에 위대한 가치를 부여하며 써 내려간 작품입니다. 그러나 이제, 현대적인 사상과 가치관을 적용한다면 공감하기 어렵고 내용이 불손합니다. 이 책을 지배하는 전제 관념, '바닷속 고래들은 괴물이며 인간에게 정복되어야 할 적이다'라는건 틀렸습니다. (물론 문학은 당시의 사상과 가치관을 인정하며 읽어야 한다는 주장도 존중합니다) 인간이 석유의 존재를 아직 모를 때, 일상에서 사용하던 기름을 얻기 위해 향유고래들을 사냥했지만, 사실 고래들은 보호받고 인간과 더불어 살아야 할 소중한 생명이자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읽어가며 마음 한 편 계속 불편함을 느낀 건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고래가 인간을 즐겨 먹으며 인간의 피를 갈구한다든지 하는 허무맹랑한 미신적 전승들, 단지 배의 수평을 맞추기 위하여 참고래(현재 멸종 위기종)를 사냥해서 사체를 배에 걸어둔다든지, 세상에서 흰색이 가장 위대한 색이라서 백인이 세상을 지배하며 흰고래(한자문화권에서 쓰였던 예전 제목이기도 한 '백경')가 가장 위대한 고래라는 인종차별적 논리 등등, 제 소감은 이 책은 단지 '문학적'으로만 인정받아야 할 책이라는 생각입니다. 대단한 책이긴 합니다만, 이제는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을 포경업, 포경선, 포경 도구의 기능적 설명이 절반이 넘고, 가치관 또한 시대에 뒤떨어진 이 작품은, 책을 끼고 사는 하드리더들에게나 읽어볼 만하지, 가끔 책을 읽는 라이트한 독서가들은 굳이 완독할 필요가 있을까? 축약이나 요약본, 작품 해설 등으로 내용을 알아두는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모비 딕>하면 문학동네, 작가정신, 두 곳의 출판사 책이 많이 읽히는 편인데, 작가정신은 일러스트판, 보급판 두 종류의 책이 나와있습니다. 여러 번 언급하듯이 이 책은 고래, 포경선, 포경 기구들에 대한 설명이 절반인데, 그냥 글로만 읽어서는 도저히 머릿속에 모양이 들어오지도 않고 이해하기도 어렵습니다. 작가정신의 일러스트판에는 디테일한 도판이 수백장 삽입되어 있어 설명을 이해하기에 큰 도움이 됩니다. 책값이 비쌉니다만, 비싼 값을 한다고 보면 됩니다. 번역은 문학동네판은 작가 황유원님, 작가정신판은 전문 번역가 김석희님이 했습니다. 두 권을 꽤 많이 읽어가며 비교도 했는데, 제가 위에 서술한 바, 연극적이고 오페라적인 대사들은 역시 작가 출신의 황유원님의 번역에서 그 장점이 도드라졌습니다.
그래픽노블을 좋아해서 틈나면 사다 놓는 편입니다. 예전에 이 <모비 딕 - 그래픽노블>도 샀었습니다. 이번에 소설을 다 읽고 그래픽노블도 읽어보았는데, 딱히 매력을 느끼지는 못했습니다. 원작 소설의 1/3 정도 정도밖에 되지 않는 서사 부분만 만화로 그려 옮긴 듯한데, 그림이 아름답지도, 원작에서의 그 유려한 표현을 능히 담아내지도 못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해는 됩니다. <모비 딕>의 그 '거대한 세밀함'을 한정된 지면의 만화로 표현하기는 불가능할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비 딕>을 읽지 않고 내용을 알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는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제 딸에게 원작을 완독하는 대신 이 그래픽 노블을 권할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