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에는 <보바리 부인> 소설의 주요 줄거리와 결말이 누설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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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대 중반, 그 당시까지 주로 신화, 종교, 풍경, 귀족 등이 그림의 대상이었던 미술계에서 의미 있는 변화가 시작됩니다. 평민이나 일상의 모습을 그리는 화가들과 그림들이 메인스트림에 등장합니다. 농촌 출신으로 농민을 주로 그렸던 밀레의 그림들도 그랬습니다. 특히 그의 작품 <씨 뿌리는 사람>은 예술적인 측면보다 정치적, 사회적으로 많은 파장을 불러오기도 했습니다. 그림 속, 파워 넘치는 농민이 입은 파란색, 흰색, 빨간색 복장은 프랑스 국기의 색이기도 합니다. 도시에서는 부르주아로 불리는 상인들, 지방에서는 부유한 자영농들이 자신들의 사회적 포텐셜을 끌어올리며 전통적 귀족문화에 균열을 일으키는 중이었습니다.
잘나가는 사업가까지는 아니었던 한 부르주아의 아들 - 닥터 보바리와 결혼한, 규모가 상당했던 한 자영농의 딸 - 엠마 보바리가 이 소설의 주인공입니다. 이것만으로도 의미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그녀는 시골 농장을 벗어나고 싶다는 1단계 욕망을 결혼을 통해 이루어냅니다만, 그 1단계 욕망은 그저 촌구석 소녀의 낮은 레벨의 꿈이었다는 걸 깨닫는데 불과 한두 달 밖에 걸리지 않았으며, 더 큰 도시로 진출하여 찬란하고 화려한 귀족으로 살고 싶다는 다음 단계의 욕망 또한 그저 잠시, 향수 냄새 철철 풍기는 훈남 귀족과 날마다 뜨거운 밤을 보내기 위해 진절머리 나는 살림살이에서 탈출하고자 감당 못할 욕망을 급발진시키고야 맙니다.
나는 불륜이 소재인 소설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 책의 내용도 시시껄렁 그 자체였습니다. 그 당시 너무 파격적이라 기소까지 됐다는 그 음란함 조차, '야동'이 공중파 예능 소재로 쓰이기까지 하는 작금의 시대 기준에서 보자면 역시 전체관람가 수준의 시시껄렁입니다. 그러나 "당대 최고의 화가가 철딱서니 없는 아낙 한 명을 앉혀놓고 온 정성을 들여 아름답게 그려내어 마침내 전설의 명화가 탄생했다" - > 제가 이 책을 다 읽고 든 느낌이었습니다. 이 소설에서 플로베르의 글은 처연한 아름다움 그 자체입니다. 19세기 프랑스 불륜소설계 전설의 3인방 - 스탕달, 발자크, 플로베르. 그중에 플로베르의 글이 으뜸입니다. 이 시시껄렁한 책의, 전혀 예상치 못했던 여운이 아직도 깊고 그윽합니다.
샤를과 엠마가 읍내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시골집으로 돌아오는 길의 광경을 묘사한 부분은 내가 지금까지 읽었던 고전소설 중에서 가장 서정적인 장면이었고, 농업 공진회가 열리던 날 면사무소 2층에서 로돌프가 엠마에게 껄떡대던 모습은 내가 읽은 고전 연애소설 중에 가장 아찔했던 장면이었으며, 루앙에서 엠마와 레옹이 마차 안에서 '무언가'를 벌이던 그 장면은 가장 로맨틱했습니다. 그것들은 마치 영화 속 한 장면 같았지만, 웬만한 역량의 감독이 아니고서는 소설에서만큼의 그 아름다움을 절대로 쉽게 뽑아내지는 못할 것입니다.
책 뒤쪽 작품 해설과 몇몇 서평을 읽어보았는데, 역시 천편일률적인 이야기들이 회자됩니다. 어느 심리학자가 작명했다는 '보바리즘'이라는 용어 - 현실의 자아와 이상의 자아 간의 괴리로 인한 부정적 현상을 설명하는 심리학적 논지 -가 가장 많이 보이던데,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는 법, 현실과 이상의 자아 간 괴리는 이 소설이 쓰이기 200년 전 이미 라만차의 돈키호테 님께서 스펙터클하게 발현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또한 '구습에 맞서고 위선을 벗어던져 솔직한 여성 본능을 실현하고자 하였으나 현실의 벽에 부딪혀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라는 논조의 글들도 복사되어 많이 퍼졌던데, 그런 의견에 공감이 가기보다는, 독서초보로서 조심스러운 개인적인 감상은, 이 책은 어느 시골에서 태어난 아름다운 여자의 일생이라는 주제로, 마치 병풍에 그려놓은 연작 그림 같은, 사실주의적 탐미 성향의 소설 중에서 최고급단에 위치한, 그런 '예술'작품 같다...라는 느낌이었습니다.
이 책을 읽어나가며 전도연, 최민식의 영화 '해피엔드'가 많이 떠올랐습니다. 후반부로 갈수록 이거 혹시 결말도 비스름하게 가는 거 아닐까 하는 추측도 해보았습니다. 극중 최민식처럼 샤를이 모든 걸 해치운 후 혼자 딸을 키우는 모습을 연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플로베르는 해피엔드의 감독보다 더 잔인했습니다. 엠마를 그렇게 비참한 모습으로 죽게 내버려둔 것도 모자라서 가족들을 아예 몰살시켰습니다. 그들의 죽음이 엠마의 죽음보다 더 슬펐습니다. 플로베르는 이 결말을 통해 엠마에게 처절한 응징을 가한 것일지도 모르겠단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혼자 살아남아 공장에 보내진 가여운 베르트. 소녀의 앞날에 행복이 깃들길 기도하며 다음 읽을 책을 골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