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연말연시, 코로나바이러스 창궐 몇 주 전, 저는 3월 초 출발 인도 델리행 비행기 왕복표와 호텔 4박 바우처를 구매해 놓고 인터넷에서 한참 인도 여행 정보를 찾아 챙기는 중이었습니다. 가족을 내팽겨놓고 홀로 여행을 다녀오기란 쉽게 결정할 수 없는 일이었음에도,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내와 딸아이들은 인도로 가는 길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저는 한살이라도 덜 먹었을 때 인도를 정말 가보고 싶었고, 그 와중에 팬데믹이 찾아왔습니다.
(코로나로 고생하신 환자분들과 의료진에게 위로와 감사의 말씀을 전하며) 결국 여행은 눈물의 취소 결정, 항공권은 쉽게 환불이 되었지만 호텔은 며칠 간의 이메일전투에도 불구, 환불에 실패하고 그 호텔에서 아직 디파짓 명목으로 가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그 호텔이 망하기 전, 팬데믹 종료와 동시에 디파짓 300여 달러를 찾으러 인도로 날아갈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팬데믹 기간 중에 공교롭게도 제가 가장 많이 읽었던 책이 러시아 고전이었습니다. 올해 읽은 책만 해도 <부활>, <죄와 벌>,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위시한 톨스토이의 단편들, <전쟁과 평화>인데 다른 러시아 고전들과 마찬가지로 모스크바와 더불어 페테르부르크가 주요 배경이 되는 소설들이었습니다. (주로 열린책들의 책을 읽어서인지 페테르부르크보다는 뻬쩨르부르그라는 발음이 더 친숙합니다만)
저는 소설을 읽고 나면 소설에 등장했던 장소에 대해 구글맵 로드뷰 검색을 가끔 해봅니다. 실제 존재하는 장소들은 구글맵에 '가고 싶은 장소'로 마킹해둡니다. <죄와 벌>을 읽고 현지의 라스콜니코프의 하숙집을 비롯해 몇몇 <죄와 벌> 플레이스에 대해 구글맵으로 살펴보고 블로그 몇 개를 본 후 '페테르부르크'라는 곳에 정말 가보고 싶어졌습니다. <전쟁과 평화>를 읽으면서 의도치 않게 러시아의 역사에 대해 많은 글을 읽었고, 페테르부르크에 대해 개략적인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알게 되었습니다. 러시아의 유럽화를 위해 표트르황제가 막중한 공을 들여만든, 유럽에서 정말 많은 사람들이 칭송해 마지않는 멋진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이 지긋지긋한 팬데믹이 끝나면, 이 암울한 시대, 저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다들 저마다 팬데믹 이후의 해외여행을 꿈꾸고 있을 텐데, 저는 제 돈이 묶여있는 델리가 아니고 페테르부르크를 1번으로 정했습니다. 그러다 신간소개 기사 중에, 가슴이 웅장해지는 멋진 제목의 책을 보게 되어 무지성으로 구매버튼을 클릭했습니다.
160페이지 정도 되는 다소 얇은 책입니다. '파롤앤'이라는 처음 들어보는 새로운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고, 저자는 월간지 '객석'에서 기자로 오래 근무하시고 현재는 연극계에서 주로 활동하시는 '김주연'님이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표지를 비롯해서 '김병진'작가께서 그리신 멋진 풍경 세밀화가 간지로 삽입되어 있습니다. 흔한 여행 에세이나 가이드북은 아닙니다. 저자의 활동분야가 무대예술계이니만큼, 이 책 역시 페테르부르크라는 도시에 대해 주로 음악, 공연, 문학의 시각에서 저술된 책입니다. 여행을 염두에 두고 이 책을 사신 분들이라면 당황하십니다. 쇼핑이니 맛집이니 여행코스에 대해서는 단 한 줄도 소개되어 있지 않으니까요. (저는 그래서 샀습니다!) 이런 책들을 보면 주제넘은 걱정을 한번 해보기도 합니다. 파리, 로마처럼 핫한 도시도 아니고 유럽 변두리 도시, 그것도 특정 분야에 대한 이런 책들은 과연 얼마나 팔릴 것인가...
페테르부르크에는 100개 넘는 극장(영화상영관 말고 공연을 하는)이 있다고 합니다. 볼쇼이와 더불어 러시아 양대 발레단인 키로프(현 마린스키)발레의 본거지 마린스키 극장부터, 제가 클래식 음악엔 전혀 깊이가 없는 초보이지만, 정말 제가 좋아하기도 하고 어디 가서 무슨 곡을 좋아하냐고 질문을 받으면 늘 나오는 대답이 쇼스타코비치의 The Second Waltz인데, '페테르부르크 쇼스타코비치 필하모닉'의 본거지 볼쇼이 잘 극장 등을 비롯, 클래식, 오페라, 연극, 인형극 등이 365일 올려지는 페테르부르크의 주요 무대에 대해 저자는 간략한 역사를 곁들여 내공이 느껴지는 설명을 이어나갑니다. 무대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고, 나머지 절반 정도, 에르미타주(겨울궁전)을 비롯하여 문화예술적인 측면에서 중요한 몇몇 도시 스팟에 대해서도 이야기합니다.
책을 읽고 나서, 단순히 '죄와 벌' 투어 정도로만 기대했던 제 미래의 페테르부르크 여행이 '숨겨진 유럽의 고품격 문화예술 여행'으로 업그레이드되었습니다. 러시아에 관심 있으시고 러시아문학, 러시아 예술에도 관심이 있으신 분이라면 한번 읽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관심은 없지만 혹시 페테르부르크에 갈 계획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나중에 도서관 가셨을 때 잠깐 훑어 읽는 것도 괜찮을 겁니다. 분량이 적어서 좀 아쉬웠습니다. 역사적, 인문학적 내용으로 좀 더 두툼했으면 좋았겠다라는 생각이지만 저의 욕심이란 걸 잘 압니다. 사진과 도판이 흑백이 아닌 컬러였으면 또 좋았겠다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과연 희망대로 펜데믹이 끝나면 거기에 갈수 있을까...시간적, 경제적 여유는.....모르겠습니다. 네바강의 밤안개처럼 매우 불투명합니다. 뭐 아무렴 어떻겠습니까. 여행은 계획할 때 가장 행복한다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