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봄이었던가, 신간소개를 훑다가 이거다!하며 샀지만 최근에서야 읽은 책입니다. 몰론 사고나서 몇 년이 지나고도 읽지못한 책들도 많습니다만.
때는 1950년대, 시카고에 소재한 '안전한 흑인 여행사'에서는 '안전한 흑인 여행 안내서'라는 책을 발간하여, 당시 미국에서 극심했던 인종차별로부터 흑인들이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는 도시, 교통편, 숙박지, 식당들을 소개하였고, 장,단기 여행을 떠나는 흑인들은 이 책을 비장하게 가슴팍에 꽂아 품으며 가시밭길 같은 여행길에 오르곤 했습니다. -> 실화는 아니고 이 책, '러브크래프트 컨트리'의 도입부의 배경스토리입니다. '안전한 흑인 여행 안내서'가 실제로 존재했던 책은 아니지만 그와 유사한 <흑인 운전자 그린북>이라는 가이드북이 실제 있었다고 저자의 에필로그에서 밝혔고, 그 책은 그들 흑인들 사이에서 무척 가치있게 유통되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 악명높은 '짐크로법 ; 인종분리법'이 무려 1965년까지 합법으로 지속되었던 혐오스러운 사회가 바로 미국이었으니까요. 실제로 70년대 초반까지 미국의 지방에서는 흑인은 백인이 이용하는 식당, 숙소, 상점, 술집, 심지어 대중교통까지 이용할 수 없었으며, 접근하면 '법에 따라' 처절한 응징을 당하곤 했다는건 주지의 역사적 팩트입니다. 특히 보안관이 바로 법 그 자체였던 시골에서는 억울한 죽임을 당하는 사례도 많이 있었다고 하며, 예전에 재미있게 읽었던 플래너리 오코너, 유도라 웰티,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같은 시대적 배경인 포크너의 소설들까지, 그런 작가들의 작품에서도 암울한 인종차별의 분위기는 많이 느껴졌더랬죠.
6.25 한국전에 참전하고 귀향길에 오른 흑인청년 '애티커스 터너'도 '안전한 흑인 여행 안내서'를 시도때도 없이 펼쳐보며 수천 킬로미터를 차로 운전하며 집으로 돌아가는데, 차가 고장나 살기 넘치는 눈빛의 차량정비사도 만나고, 스트레스를 풀려고 흑인 하나 죽이고 싶어하는 보안관도 만나는 우여곡절의 여행이 이 소설의 시작입니다. 여기까지 보면 인종차별에 대항하는 흑인 청년의 눈물겨운 스토리가 아닐까 하시겠지만, 이후부터는 본격적으로 초자연적 미스테리 SF 어드벤쳐가 시작됩니다. 대략 470여 페이지 정도의 장편소설이지만, 크고 작은 단편 모음집의 (러브크래프트의 소설들처럼) 느낌입니다. 첫 에피소드만 애티커스라는 청년이 주인공이고, 그의 아버지, 동네 여자사람친구, 숙모, 동네 여자사람친구의 언니, 조카 등등이 각각 주인공으로 나오는 6개의 에피소드, 그리고 모두 다 등장하는 마무리 씬까지, 8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각 에피소드의 내용들은 사교(邪敎)의 우두머리와 각자의 초능력으로 대결을 하고, 오래된 저택의 유령과 밀당을 하고, 수천만 광년 떨어진 다른 은하로의 웜홀을 왔다갔다하며, 신비의 물약으로 변신을 하는 등 SF, 환타지, 호러 등이 골고루 배합된 내용이며, 큰 줄거리는 애티커스의 가족과 마을주민들이 초능력을 가진 백인 사교집단과 맞서 싸운다는 이야기입니다.
<러브크래프트 컨트리>라는 제목은 중의적 표현입니다. 러브크래프트에 대해 알고 계신 분들이라면 아시듯이 그의 문학세계는 온통 초자연, 공포, 괴물, 유령, 우울의 세계였으며, 또한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였습니다. "하나님이 선과 정의를 빚어 백인을 만들고, 세상의 모든 악을 구겨넣어 깜둥이라는 괴물을 만들었다"라는 내용의 유명한 시를 짓기도 했었죠. 문학적인 소질과는 별개로 쓰레기같은 인간이었긴 합니다. <러브크래프트 컨트리>라는 나라는 인종차별주의가 극심한, 초자연, 초능력의 괴물들이 득실득실한 암울한 세상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 책의 저자는 의외로 백인입니다. '맷 러프'라고 아이비리그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수재라고 하며, 전혀 느껴보지 못했을 흑인 시점으로 바라보는 세상, 때로는 비참하고 때로는 공포스럽고 그러나 때로는 희망을 보는 세계를 잘 창조해 낸 듯 합니다. 이 소설은 드라마화 되었습니다. 나름 자타공인 '미드의 명가' HBO에서 제작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왓챠나 웨이브에서 볼 수 있습니다. 웨이브를 구독 중이라 소설을 다 읽고 1화를 보기 시작해봤는데, 실망감에 멈췄습니다. 자고로 원작을 넘는 실사화는 존재할수 없는 법, 모든 소설이 마찬가지지만, 제가 책을 읽어가며 상상했던 애티커스가 드라마 속 애티커스보다 100배는 더 애티커스답고, 제가 상상한 러티샤(중요 여성등장인물)가 100배 더 러티샤다웠기 때문입니다.
똑같이 괴물과 유령이 등장하며 초자연적인 공포가 지속되는 스토리지만,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은 음침하고 우울한 분위기가 지배를 하는데 반하여 이 소설은 밝고 경쾌한 분위기가 이어진다는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왜 그럴까 잠깐 생각해보았는데, 러브크래프트 소설의 인물들은 늘 공포감에 짓눌리며 항상 도망다니는 장면을 주로 연출했던 반면에, 이 소설에서는 등장인물들이 극심한 인종차별 속에서 살아가지만 늘 희망을 보고 도망가지 않으며 악의 무리와 맞서 싸운다는 긍정적, 능동적 캐릭터들이라는 것이 답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