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시간’
정미 시간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며, 철학적인 표현으로 사용되는 시간 개념이며, 우리들 의식 위에 둘 수는 없다. 상대 시간에 대응해서 쓰이는 표현이다. (네이버 백과사전)
도서관에서 이 책을 고른 것은 다른 책들보다 표지가 조금 좁아 안으로 쏙 들어가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안을 들여다보니 글자가 빽빽하진 않지만 문장이 멋있어 바로 덮고 빌렸던 기억이 난다. 책상 위에 올려놓고 계속 읽어야지, 하다가 다른 책에 밀려 자리만 차지하던 중 다른 책 대출 기한이 다 되어 이 책도 함께 반납하러 가던 길이었다. 아직 날짜가 조금 남아있는 것을 알고 도서관 주차장에서 이 아이를 뺐었다. 그렇게 이 책을 만났다.
김엄지 작가의 책은 이 책을 다 읽은 후 이 작가의 책을 더 읽어보고 싶어 온라인 서점에 검색하다 익숙한 제목이 있어 내가 이미 한 번 읽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 블로그에 보니 불과 2년 전에 아주 독특한 책이라며 리뷰를 써 놓은 게 있었다. 풍요롭고 모든 걸 가진 것 같지만 정작 한 사람 한 사람 들여다보면 수많은 고민과 갈등, 그리고 외로움에 지쳐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은 책이었다는 게 어렴풋이 떠올랐다. 이분의 책을 읽었었구나. 그런데 이번 책은 정말 독보적으로 독특하다. 작가의 중고 책을 세 권 더 주문했다.
어릴 때 동생과 대화하던 중 이런 말을 들었다. 누나랑 이야기를 하면 이 말하다 저 말하다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를 해서 헷갈린다는 것이다. 나의 머릿속에서 대화를 넘어 징검다리처럼 새로운 다른 주제가 막 떠오르고, 상대는 그 속도를 따라오지 못한다는 것일까? 그 말을 아직 기억하는 것은 내가 모르는 나를 알게 해 준 소중한 순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나의 그런 면을 100배 부풀려 보여주는 느낌이었다. 독자는 작가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대로 생각한다. 작가는 친절하게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순서대로 들려주지 않는다. 이 이야기의 어디가 현재이고 어디가 과거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때때로 나오는 시간적인 말, 8개월 전, 내일, 어제와 같은 말들은 언제로부터 어제인지, 언제로부터 8개월 전인지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이야기가 뒤죽박죽 된 장면들이 퀼트 이불처럼 조각조각 엮여 있다. 어쩌면 5미터 아래로 추락한 사고 이후 기억과 정신이 온전치 않게 된 이야기일지도 모르고, 아니면 원래 이 남자는 회사 생활의 스트레스와 대인관계 때문에 정신적인 질환을 앓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전에 읽었던 엄지 작가의 ‘주말, 출근, 산책’에서 ‘고등어, 술, 담배, 우산, 양말’이 계속 등장했던 것처럼 이 책에서는 ‘만국기, 창, 호수, 아내의 목 뒤의 점’과 같은 상징적인 말들이 반복된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들은 실제로 있었던 일일까? 우리가 생각으로 만들어낸 기억은 없을까? 이 책의 주인공 R도 그 애매한 기억들 속에서 헤맨다. 원래 아내는 있었던 것일까? 상상 속 인물일까? 사고는 실제로 있었던 것일까? 물론 아내와 사고, 그리고 제인 호수에 갔던 기억은 모두 사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을 읽다 보면 그런 확실한 경험조차 의심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하늘을 날아다니고, 천장 위의 먼지를 상상하며, 없는 창밖의 소음은 벽을 뚫고 들어온다. 다투다 화장실로 들어간 아내는 기척이 없고, 그는 정말 아내가 욕실에 들어간 것인지 헷갈린다. 기억의 조각들. 불친절한 뒤죽박죽 된 시간의 배열은 작가가 제목으로 정할까 고민했던 ‘정미 시간(절대 시간)’인지도 모른다.
나는 왜 이 책을 끝까지 읽었던 것일까? 이 책은 다른 소설과 다르게 무언가 철학적인 면이 있다. 그 점에 끌렸다고 나는 생각한다. 책이 다른 책 보다 좁았던 이유가 있었다. 이 소설은 시처럼 행갈이(강제 줄 바꿈)를 계속한다. 시와 산문의 경계. 나는 이런 문장을 좋아하는 게 아닐까? 쉬고 싶을 때 행갈이를 한다는 작가는 이 책을 쓰며 수없이 많은 행갈이를 하면서 행복했을까? 책이 좋으면 작가에 대해 알고 싶어 진다. 수년 전 소리지르기 대회에서 우승해 받은 자전거를 타고 이 카페, 저 카페를 누비며 때로는 벤치에 앉아 자전거 안장에 노트북을 얹고 소설을 썼을 장면들을 상상한다. 글을 쓰다 얼음을 얼리고, 해변으로 향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창을 갈망하는 작가를 떠올린다.
이 소설의 해석이 궁금해 다른 분들이 읽고 쓴 글들을 찾아보았다. 내가 보지 못한 부분들을 알아챈 분들도 있었고, 대부분은 어느 부분을 먼저 읽어도 상관없는 생각의 조각들임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죽으러 간다는 제인 호수에서 R은 돌아왔을까? 그는 죽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고 말했고, 호수 입구 매점의 스키바지 입은 남자는 언 호수 바닥에서 검은 점퍼를 발견한다. 책의 앞부분에 호수 바닥에 넘어져 있던 R이 자신이 왜 거기에 있었는지 모르게 일어나 함께 간 아내의 행방을 모르는 채 돌아오는 장면을 떠올리며 좋은 결말을 상상한다. 앞으로 그가 기억의 파편들 속에서 시간이 뒤죽박죽 된 채 살아가더라도 말이다. 아내는 원래 없었던 것이라 믿으며, 의학의 힘을 빌어 다시 시간 순서대로 정리된 삶을 살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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