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채식주의자>라는 책과 영화로 충격을 받았다. 세계적인 상을 받았다는 것으로 너무 기대를 해서인지 아니면 내가 즐겨 읽는 스타일의 소설이 아니어서인지 이유는 모르지만 그다지 기분 좋은 만남이 아니었다. <흰>이라는 책에서는 시인 같은 감성을 느낄 수 있어 책마다 무언가 다른 걸 담아내려 노력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이 책 <희랍어 시간>이라는 책으로 그녀를 다시 만났다. 서론 같은 의미심장한 1인칭의 첫 장을 지나고 2장에서 3인칭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첫 장면이 머릿속으로 영상을 그릴만큼 세밀하게 묘사가 되어 있어 여기서부터 강하게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 여자는 왜 갑자기 말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일까? 그 궁금증이 이 책을 놓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 책은 술술 넘어가는 책은 아니다. 부분, 부분 시를 읽는 듯, 그림을 보는 듯 상상하며 읽었다. 그리고 독특한 점이 있는데 각 장별로 1인칭이나 2인칭이었다가 3인칭으로 계속 변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처음에는 그들이 한 사람인가 했었는데 그것이 아니고 1인칭과 편지글 형식의 2인칭은 시력을 잃어 가는 남자 이야기, 3인칭은 말을 잃은 여자 이야기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그래서 한참 읽다가 다시 앞으로 돌아가길 여러 번 했다.
한 문장, 한 문장을 정성 들여 썼을 작가의 노력이 느껴졌고, 책을 다 읽을 즈음 두 사람의 인물이 나의 지인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들이 갖지 못한 것,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이 몽글몽글 자라났다. 말을 잃고, 자식을 잃은 여자와 친구를 잃고, 시력을 잃어 가는 남자는 상실감으로 무기력하고 눈에 띄지 않는 익명의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책에 이름도 등장하지 않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을 잃은 두 사람은 서로의 아픔을 위로할 수 있을까?
인생은 참 의도한 대로 살아지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남자와 여자는 우리의 또 다른 모습인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잃고, 방황하는 우리는 책 속 주인공들을 보며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 이런 어려움에도 살아가는데 나는 더 힘을 내야겠다는 생각은 나만의 것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나에게 위로로 다가왔다. 마음껏 방황하고 숨죽이며 살아가고 있지만 삶의 희망을 잃지 않고, 누군가에게 하나의 위로가 되는 남자와 여자, 그리고 우리들.
스쳐 지나가면 잊힐 것들을 간절히 부여잡고, 글로 담아낸 한강 작가의 뛰어난 문체를 간직하고 싶다. 이 책의 섬세하고도 강렬한 표현들이 오래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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