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학기 딸아이가 대학 수업 교재로 사용했던 책들 중 유토피아가 있는 걸 보고 그전부터 읽고 싶었던 책이라 얼른 집어 들었다. 깨끗한 양장본이라 읽기에 좋았다. 딸이 읽으면서 밑줄을 긋고 설명도 곁들여 놓아서 더 애착이 갔다.
이 책은 토머스 모어가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로스를 만나기 위해 플랑드르로 가는 길에 만난 포르투갈 선원 라파엘 히슬로다에우스와 나눈 이야기를 적은 것이다. 라파엘은 정치를 국왕의 노예가 되는 굴종이라 생각해 키케로가 정의한 자유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대로 살기를 원한다. 정치적 소신은 뚜렷하여 도둑질한 이들을 교수형에 처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과도한 처벌은 범죄를 막는데 효과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가르치기보다 매질만 하려 드는 훈장과 다를 바 없는 것이라며 모든 사람이 자기 생계를 잘 유지하도록 해 주는 것이 처벌보다 중요하다는 말을 한다.
라파엘은 사유재산이 없는 유토피아에서 5년간 살다가 그곳에 대해 알리기 위해 떠나왔다고 말한다. 그의 이야기에 흥미가 생긴 모어는 그 나라의 지형부터 강, 도시, 사람들, 관습, 제도, 법과 같이 궁금한 것들에 대해 차례로 설명해줄 것을 요구하고 그 뒤는 라파엘의 유토피아에 대한 묘사와 설명으로 채워진다. 54개의 도시가 언어와 관습, 제도, 법이 모두 같으며 시골에서 2년씩 농사를 짓고, 10년에 한 번씩 추첨으로 집을 바꿔 사는 등 사실 자유롭게 노력하여 얻는 것이 아니고 주어진대로 열심히 사는 삶이다. 오늘날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와 닮았다고 볼 수 있다. 30가구당 한 명의 관리가 선출되며 그들 10명 중 관리인 1명이 있어 그들이 모여 원수를 선출하고 그가 폭군이 아닌 이상 종신 유지토록 한다.
허가증 없이 도시를 벗어난 탈주자가 두 번째 그 잘못을 저지르면 노예가 되기도 하고, 모든 이는 빈둥거리거나 시간을 허비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으며, 아픈 경우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지만 치료가 불가능하거나 극심한 고통이 있는 경우 스스로 혹은 남에게 부탁해서 약을 먹고 잠든 후 죽을 수 있다. 하지만 아픈 경우가 아니고 그냥 자살한 경우에는 매장이나 화장을 하지 않고 늪지에 버린다고 한다. 혼전 성교를 한 경우 큰 벌을 받지만 신랑과 신부는 나체로 선을 보이고, 간통하면 이혼, 두 번 하면 사형이다. 여성의 군 복무나 참전을 장려하고, 전쟁은 싫어하지만 용병을 사서 싸움을 승리로 이끌고자 한다.
굉장히 강력하고, 자유가 없는 유토피아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 곳이라는 생각을 하며 책을 읽었다. 사유재산이 없이 모든 것을 나누고 가난한 사람이 없으면 모두 행복할까? 모순이 가득하고, 기묘하기까지 한 유토피아에서 나는 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10년에 한 번씩 집을 옮겨야 하고, 다른 곳에 가기 위해 허가증을 받아야 하며, 두 번을 허가 없이 벗어나면 노예가 되는 세상이 과연 유토피아일까?
이 책이 나오게 된 것은 저자의 독단적인 상상 때문만은 아니다. 책 뒤에 소개된 여러 자료를 보면 그 이전에 이미 이상 세계에 대한 내용이 많이 다뤄져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어는 아마도 그 책들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이후 이 책은 공산주의 저작에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고, 부유한 것이나 금은과 같은 귀중품을 오히려 천하게 여기는 것, 필요한 만큼만 가지고 더 갖고자 애쓰지 않는 것은 물론 고귀한 가치이다. 하지만 그것이 강요가 된다면 그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개인의 판단에 의한 결과일 때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이지 국가나 사회가 강제하거나 엄격한 법률을 계속 만들어 사람들을 옭아매는 것은 모두가 불행해지는 지름길이 아닐까 한다.
수많은 모순점과 억지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지니는 가치는 아마도 당시 불합리했던 나라 안팎 사정 때문일 것이다. 현실 세계의 디스토피아적인 일들은 저자의 분노를 자극했을 것이다. 허구적인 유토피아를 보면서 부조리한 현실을 비추어 적어도 어떤 것이 바람직한지 생각해볼 기회는 준다. 정치는 아마 공동체가 형성됨과 역사를 같이 할 것이다. 두 사람 이상이 모여 결정하는 일부터가 정치의 시작이라고 초등학교 6학년 사회 교과서에 나온다. 모두가 행복하기 위한 최선의 정책을 펴는 일은 개개인의 삶에 영향을 준다. 한 학급을 어떻게 운영할지 고민하는 과정이 한 해 학생들의 학교생활을 좌지우지하듯 한 나라의 정책 결정은 몹시도 중요하다. 개인이나 자신이 속한 그룹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정책은 많은 이들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계기가 될 것이다. 진정 국민을 위한 정책을 펼치는 정치인들을 기다리는 일이야말로 세상에 없는 유토피아에 대한 갈망일까?
* 팟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