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다 읽었습니다. 진짜 별 거 아닌데도, 감개가 무량할 정도는 아니지만 오랫동안 마음속 깊이 들러붙어있던 숙제 하나를 떼어버렸다는 청량감과, 훗날 먹으려고 고이 아껴두었던 과자를 낼름 다 먹어버린 아쉬움이 공존합니다. 캐릭터와 줄거리는 전 세계 사람들이 거의 다 알고있지만 그 사람들 중에 완독한 사람은 백 명에 두세명도 안된다는, 저도 그 나머지 아흔 몇 명 속에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제는 완독한 두세명 안에 포함된다는 사실이 은밀하고 소심하게 자기만족감을 불러일으키는 중입니다!
본편과 10년 뒤에 쓰여진 속편까지, 두 권 합쳐 대략 1,700여 페이지의 나름 긴 장정이었습니다. 저는 무척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시간은 좀 걸렸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1600년대 초 고리짝 옛 시절, 이 땅의 우리 조상님들은 당시에 존재도 몰랐을 뿐더러 일말의 교감도 교류도 없었던 지구 반대 편 다른 세상의 노작가가 쓴 소설이 오늘 이렇게 마음 속 거대한 떨림과 울림을 가지고 올 줄은 몰랐습니다. 한 장면 한 장면이 심도있는 희노애락을 불러일으켰고 한 마디 한 마디가 주옥같은 명대사, 명문장의 연속이었습니다.
줄거리는 다들 알고 계시듯이, 시골의 늙은 하급귀족이 기사소설에 너무 탐닉한 나머지 정신이 약간 이상해져서 편력기사 문화의 부활과 중흥을 부르짖으며 모험과 순례의 방랑길를 나선다는 이야기입니다. 풍차 에피소드나 소떼 에피소드 같은 것이 널리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만 그런 모험이나 해프닝은 전체 분량에서 봤을 때 비중도 얼마 되지 않으며 전혀 중요하고 의미있는 요소들이 아닙니다. 돈키호테의 모험을 계기 삼아, 혹은 매개로 하여 1. <모험길에서 돈키호테와 산초가 서로 간에, 혹은 제삼자들과의 대화> 2. <모험 길에서 만나는 등장인물들의 독립적인 스토리들>의 두 가지가 소설 전체를 가로지르는 핵심적인 뼈대로 이어져 있는 구성입니다.
돈키호테가 정신이 이상한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엄청난 독서가이며 예리한 통찰력을 지닌 사상가라는 건 확실히 알겠습니다. 정치, 군사, 문학, 사회, 종교, 문화 등등 다방면의 어마어마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현세, 권력, 권위, 허세에 대한 풍자와 비판을 쏟아내며, 산초의 입으로부터는 지식이나 학식은 아니지만 인간사, 본능, 감정, 세속에 대한 촌철살인의 이야기들이 무수한 속담들과 함께 쏟아져 나옵니다. 400년이 지난 오늘 읽어도 감탄스럽고 공감하며 되새기고 싶은 문장들입니다. 메모하고 금언으로 삼고 싶은 대사들이 넘쳐납니다. 물론 돈키호테와 산초의 입을 통해 세르반테스가 한 이야기들입니다. 세르반테스는 '도른자' 캐릭터를 방어기제로 정치,종교,문화의 기득권에 자기가 하고싶은 말 다한 듯합니다.
1권에서는 문학적인 용어로 '액자소설'이라고 불리우는, 소설 속의 소설들이 몇 가지 나오는데, 아름답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입니다. 그 중 '카르데니오의 이야기'는 동시대를 살았고 단지 몇 날의 차이로 세상을 같이 떠났다던 세익스피어가 희곡으로 만들기도 했을만큼 매력적인 스토리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세르반테스는 이런 짤막한 이야기들을 모아서 '모범소설'이라는 단편모음집도 썼는데, 구입은 당장하고 천천히 읽어 볼 생각입니다.
10년뒤에 나온 속편은 세르반테스가 문학적 영감에서라기보다는 아류작으로부터 자기의 분신들과도 같은 돈키호테와 산초를 지켜주기 위한 정의감, 의무감에서 속편 집필을 시작했을 것입니다. 노년에 10년을 더 살고 쓴 작품인지라 내용은 좀 더 차분하고 얌전해졌지만 생각의 깊이, 대화 속 사상, 철학, 풍자력은 작가 인생 절정에 다다른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속편을 완성한 이듬해에 세르반테스는 세상을 떠났는데, 속편의 마지막 부분에서 작가는 그 이별을 준비하기도 했습니다. 1권 처음부터 중간중간 '빵빵 터지며' 웃으면서 읽은 소설이었는데 (오늘날 사용되는 유머나 개그코드는 이 책으로부터 기원된 것이다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눈물을 찔끔 흘리고 말았네요. ㅠㅠ
제가 읽은 책은 열린책들에서 출간한 책입니다. 2~3년전에 구입했던 책이었는데 몇 달전 리커버로 재출간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읽지도 않았던 주제에 좋아했던 돈키호테라 기어이 중복으로 다시 구매했는데, 조금 읽다보니 손에 금박가루가 묻어나더군요. 그래서 예전에 구입했던 책으로 읽었습니다.
스페인 마드리드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스페인광장이라고, 관광스팟이 하나 있는데, 그 곳은 세르반테스, 돈키호테와 산초의 유명한 동상이 있습니다. 물론 그때도 구경하며 사진도 찍고 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진짜 뭣도 모르고 뭐한건지 약간은 제 스스로에게 아쉬움이 느껴지네요. 다시 가보고 싶습니다. 그 옆에 한 두어시간 앉아있다가 오고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