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어갈수록 그리움이 많아진다. 어렸을 적 장난꾸러기였던 탈 쓰고 집에 들어온 목마른 나에게 바가지로 탈의 입 사이로 물을 넣어주며 웃으시던 외할머니가 그립고, 공부하는 척하며 뽀시락 장난을 치던 나의 학창시절이 그립다. 나를 처음으로 좋아해 주었던 한 어린 남학생이 그립고, 심지어 지금 함께 살고 있는 다 큰 우리 아이들의 어린 시절도 그립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그리움을 모으는 일이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나와 비슷하거나 조금 이른 시대에 태어나 평범한 회사 생활을 하던 저자는 사표를 써서 품고 다니다 어느 날 자기 회사를 차린다. 배는 부르지 않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 수 있는 자유는 있지 않을까? 출판사 사장님의 책을 보내주신다는 한 사원의 이메일을 보고 '문장'이라는 말에 꽂혀 흔쾌히 감사하다는 답문을 보냈다. 책이 도착했을 때 조금은 독특한 표지가 새로웠다. 보통은 그림이나 예쁜 글씨로 된 표지의 책이 많은데 얼굴이 비칠 정도로 매끈매끈한 재질의 초록색 이파리와 대조를 이루는 빨간 우체통이라니 그리 고급스러워 보이지는 않지만 왠지 모를 친근함 같은 것이 느껴졌다. 짧은 본문을 보니 사원이 말한 페이스북에서 인기 있는 작가라는 말이 떠올랐다. 아마도 온라인으로 썼던 글들을 모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읽기는 좋았다. 하나의 주제에 대해 짧게 생각해볼 수 있는 스타일은 오늘날 독자들에게 맞을지 모른다. 그림 하나 없는 담백한 책 구성이지만 오자나 탈자를 찾기 힘든 출판사 사장님다운 책이기도 하다.
사실 기대를 크게 하지 않았는데 그래서인지 너무 재미있게 읽었다. 각 꼭지마다 어투가 조금씩 다르거나 형식이 달라 지루하지 않았다. 어느 때는 편지처럼 친근하고, 어느 때는 중수필처럼 무거운 내용을 다루기도 한다. 어머니나 가족에 대한 애틋함(전라도 말투의 어머니 말 인용 부분이 정말 정겨웠다)과 젊은 시절 두근거리던 기억들, 군대 시절 이야기도 경험이 없는 나에게는 새로웠다. (이상하게 나는 남의 군대 이야기가 재미있다) 이야기들 중 순수의 시대라는 글이 너무 재미있어 혼자 피식 웃기도 했다. 책 읽는 한 여성에게 어깨를 내어 주리라 했지만 너무 무거웠던 기억. 앞으로 대중교통을 이용하다 졸음이 쏟아져도 절대 머리를 옆으로 돌리면 안 되겠다.
저자는 어린 시절부터 책을 접하고 시를 쓰는 등 문학도의 자질을 익히지만 문예창작과나 국문학과에 다니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비가 오는 날이면 회사에 출근하지 않고 시를 쓰는 이미 시인인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이 평범하게 회사원으로 평생을 보내는 건 형벌이 아니었을까? 그는 고이 모시고 다니던 사표를 언젠가 사용했고, 지금은 그가 좋아하는 책과 더불어 밥을 먹는 사람이 되었다. 글을 쓰는 건 누가 말린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닌 것 같다. 글쓰기는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선택 되는 일이라는 말을 여러 작가가 했듯 그는 어쩌면 글을 쓰고 책을 만들도록 선택받은 것인지 모른다. 그저 읽고 끄적이길 좋아하는 나도 부끄럽지만 선택되었기를 희망하고 소망해 본다.
책 속에 드물게 읽기를 권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그 중 강력한 것이 이반 일리치다. 이름만 익숙한 이 작가는 <학교 없는 사회>, <성장을 멈춰라>, <병원이 병을 만든다>라는 책들을 썼다고 한다. 아무 생각 없이 돈과 성장만이 최고라고 믿는 요즘 시대에 경종을 울리는 제목들이다. 그의 주장을 '동사가 사라진 삶'을 되돌리자고 요약한다. 사회의 부속품으로 개인의 인간으로서의 쓸모나 가치보다는 사회적 관계만을 의미하는 시대에는 시스템에 의존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현대화된 가난'을 살게 되었다고 말한다. 사회를 날카롭게 바라볼 수 있는 이반 일리치의 책을 꼭 읽어보리라 다짐했다.
책을 읽다 보면 가끔 어떤 이가 떠오를 때가 있다. 요즘 잔소리가 유독 많아진 어떤 이에게 '선배에게 드리는 충고' 부분을 읽어보라고 하고 싶다. 물론 책 전체를 읽어보라고 말할 것이다. 선배에게 드리는 충고는 후배가 선배에게 하는 충고이기도 하고 꼰대스럽지 않은 존재가 되기를 바라는 소망을 담은 편지글이다. 부분 부분이 너무 웃기고 재미있었다. 존중 받기만을 바라고, 식사 자리에서 주목 받기를 바라는 모습은 나를 뜨끔하게 만들기도 했다. 발신인은 세상에서 가장 작고 강한 무기인 책을 읽기를 선배에게 권한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이야기를 하다 보면 금세 화제가 바닥을 보인다며 책을 읽는다는 건 시대를 같이 산다는 것이고, 세상사에 참여한다는 것이고, 자기 자신의 생각을 가지는 일이라 충고한다. 책을 읽으면 조리 있고 균형 잡힌 관점을 가질 수 있다. (193쪽)
야매 작가의 글쓰기 조언과 출판인으로서 출판사에 처음 투고하는 분들을 위한 조언은 나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마지막 별책부록 선물 같았다. 여행 갈 때 가볍게 넣어가기도, 화장실에서 한 꼭지씩 읽기도 참 좋은 책이다.
* 목소리 리뷰: https://www.podty.me/episode/15382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