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 시인의 에세이를 좋아합니다. 시인의 시집은 아직 한 번도 읽어보지 못했군요. 시인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책을 무척이나 좋아하고, 시골 마을에서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간 읽은 책들이 그에게 자양분이 되어 어렵지 않은 말들로 맛깔나게 산문들을 썼습니다. 이 책은 오래 전 도서관에서 빌려 재미나게 읽고 사 두었던 것입니다.
2007년 초판 발행되었으니 벌써 12년이 훨씬 지났네요. 안성 수졸재에서 혼자 지내던 시인은 얼마 전 제자이기도 했던 시인과 25년이라는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결혼했습니다. 혼자서 잘 지낼 수 있는 사람이 함께도 잘 산다는 옛 말이 생각납니다. 이 책이 쓰일 당시에 그는 혼자서도 정말 재미있게 잘 지냅니다. 곳곳에 ‘두브’라는 호칭으로 부르는 누군가가 등장해 궁금해 했는데 마지막 저자의 말에서 ‘젊은 벗이여, 나는 당신을 두브라고 호명한다’라고 하여 익명의 독자를 향한 것임을 밝힙니다. 시인의 글이어서 글 전체가 시인 것처럼 달콤하고 찐득한 감칠맛이 있습니다. 인공향이 가미되지 않은 자연의 맛입니다.
책 제목이 새벽예찬인데 이것은 여름부터 봄까지 사계절로 나뉜 장들 중 가을이야기의 한 꼭지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새벽에 일터로 나가던 우리 조상들처럼 시인도 새벽에 일어나 마당 건너 서재로 가 서양 고전음악을 틀고 작설차를 마시며 책을 읽고 글을 쓴다고 합니다. 이 책을 읽고 한동안 새벽에 일어났던 기억이 납니다. 다시 새벽 시간을 만들어봐야겠습니다.
책을 읽다 보면 수졸재 같은 시골집을 짓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멀리서 오는 반가운 손님을 만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호젓한 여유를 즐깁니다. 밥 먹고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책을 놓지 않는 시인. 걸으면서 생각을 곱씹어 하루 종일 시를 썼다 지웠다 하는 그의 삶이 무척이나 부럽습니다. 수졸재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에 검색하니 그곳의 내외부 사진들이 쏟아집니다. 조립식처럼 보이는 담백한 집입니다. 내부는 도서관 같이 서가가 늘어서 있습니다. 좁은 집에 책 늘어나는 게 무서워 정기적으로 책을 팔거나 버리는 저에게 참 탐나는 개인도서관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책 읽는 낙으로 평생을 살아온 시인의 삶이 한결같습니다. 바위 같은 그의 꾸준함은 60권이 넘는 책들을 쓰게 했고,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했습니다. 책에서 앎을 구하기보다는 책 읽는 자체가 기쁨이었다는 그의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책을 읽는 기쁨을 알게 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펼치게 됩니다.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는 그의 삶의 자세를 본받고 싶습니다.
--- 본문 내용 ---
- 내겐 아직 할 일이 있습니다. 책을 몇 권 더 쓴다고 인생이 달라지겠는가마는 아직은 써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요절하기엔 이미 너무 나이가 많아져버렸습니다. 요절의 운명을 놓쳤다면, 이제 장수하는 꿈이라도 잡아봐야겠지요. 셀린저처럼 은둔해서 오래 살고 싶습니다. 행운이 따라야겠지요. 그동안 반듯했습니다. 너무 반듯하다는 것은 기억할 수 없는 꿈의 해몽을 구하는 일만큼이나 소득 없는 짓이지요. 절망과 광기가 일으키는 너울도 힘입니다. 그걸 타고 넘어가는 것도 삶이지요. (60-61쪽)
- 추석 연휴에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여행은 떠나는 게 아니라 돌아오는 것이다, 라는 말이 맞지요. 모호했던 몸과 영혼이 집에 돌아오니 확실하게 감미로운 감각들로 또렷해집니다. 대개 여행자는 이기심, 천박한 욕망들, 노여움에서 놓여나 순연해집니다. 여행자로서 나는 햇살과 맑은 바람 속에서 착한 생물로 거듭나서 순간마다 정화되고 숭고에 더 다가가는 듯했지요. (143쪽)
- 변방의 섬 제주도는 유배의 땅이지요. 조선왕조 5백년 동안 2백 명의 유배객들이 제주도에 들어왔습니다. 고려시대 몽고 지배기에 원제국은 타민족의 왕족 170명을 제주도로 유배를 보냈지요. 원 제국이 명에 의해 쓰러지자 다시 원의 왕족들이 제주도로 유배를 왔지요. 쿠빌라이 칸의 다섯째 아들 양왕이 지배하던 운남 지역의 양왕 후손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이들이 제주도에 그대로 눌러앉아 양, 안, 강, 부와 같은 성씨 시조가 되었지요. (174쪽)
- 바르가스 요사는 젊은 소설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숙주로 삼는 육체에 기생하는 긴 촌충과 마찬가지로 문학적 소명은 작가의 삶을 먹고 삽니다. 플로베르가 말했듯, 글을 쓰는 것은 삶의 한 방식입니다. 말을 바꾸자면, 이 아름답고 흡입력 강한 소명을 자기 것으로 삼는 사람은 살기 위해 쓰지 않고 쓰기 위해 삽니다. 작가는 살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쓰기 위해 산다는 말은 무서운 말이지요. 작가란 자기가 지핀 불에 스스로 몸을 지지는 자, 자발적으로 글쓰기의 수형을 받은 자, 문학이란 감옥 속에 자기를 가두는 자를 일컫습니다. 작가의 운명이란 제 삶을 문학이 뿌리를 내릴 수 있는 토양으로 바치는 데 있습니다. (173-174쪽)
- 제 문청시대를 회고하자면, 먼저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문청시절이라면 희망은 적고 절망은 많던 스무 살 무렵이지요. 사십 몇 킬로그램의 가벼운 몸뚱이와 그보다 훨씬 무거운 머리를 이고 스무 살을 통과하고 있었습니다. 그 또래의 청년들이 자발적이든 강제적이든 소속되는 집단이 ‘대학’과 ‘군대’지요. 저는 그 두 집단으로부터 거부당했습니다. 거부당한 자의 운명은 ‘가난’과 ‘천함’이지요. 밖으로 내쳐진 자는 떠돌이, 백수, 비주류, 아웃사이더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오로지 구원은 글쓰기밖에 없었습니다. (191쪽)
- 청소년 시절에는 날이 밝고 아침이 올 때까지, 책을 들고 있는 일이 드물지 않았습니다. 그토록 책에 몰입하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요? 저의 책읽기는 오래 굶주린 자가 음식을 앞에 두고 보이는 태도와 비슷했습니다. 저는 골방에서 도서관에서 책들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웠지요. 책을 읽고, 읽고, 또 읽었습니다. 정신없이 책을 탐한 것은 그 안에서 진정한 즐거움을 찾았기 때문이지요. 지금도 새 책을 펼칠 때마다 가슴이 뜁니다. 책읽기는 우선 남과 그가 일군 세계와의 만남이지요. 교감이지요. 제가 그 책을 읽고 있는 동안 책의 지은이와 만나는 것이지요. 만남은 대화와 소통으로 이어집니다. 타인의 말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는 동안 뜻밖에도 내면의 들뜸은 가라앉고 고독은 위로받습니다. 책을 읽으면 강박과 고독은 그 부피가 줄고 기쁨과 지혜는 커집니다. ... 책읽기는 그것만으로 그치지 않지요. 책은 지식과 교양, 그리고 사유의 풍요를 약속합니다. 책은 사람과 사물을 한눈에 꿰뚫어보는 통찰력을 키워줍니다. 책은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지혜를 주고 옳은 것에 관대하고 그른 것에 단호한 양심을 갖게 합니다. 그리하여 책은 나쁜 습관과 악덕에 분노하고 대항하는 힘을 키워줍니다. ... 고백하건대 책에서 먼저 앎을 구한 적은 없습니다. 책에서 구한 게 있다면 그건 기쁨이요, 깊고 장중한 울림이지요. 늘 앎을 구하는 것이 즐거움을 구하는 것에 우선할 수 없습니다. 책을 읽고 난 뒤 들길이나 호젓한 오솔길을 산책하는 것은 책의 자양분을 충분히 취하기 위해 빠뜨릴 수 없는 과정이지요. 그 산책은 책에서 자극받은 사유와 상상을 키우고 무르익히는 시간이지요. (276-277쪽)
* 목소리 리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