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부터 독서 목록에 있었던 조정래 작가의 에세이를 읽었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의 방대한 연작물을 내고 생전에 두 개의 문학관이 지어진 최초의 작가이다. 그가 비교적 최근에 쓴 ‘정글만리’ 외에는 작품을 읽어본 적이 없지만 이 책을 통해 지난한 그의 작업 과정과 고난의 사건들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전국 대학생들의 84개의 물음이 바로 이 책의 각 꼭지다. 그는 그 질문들에 친절하게, 때로는 질문을 수정해 주기도 하면서 답을 썼다. 경어체로 씌어 있고, 청소년에게 강의 하듯 어렵지 않은 말로 되어 있어 책이 술술 읽혔다.
지리산으로, 만주로 취재여행을 다니며 취재수첩은 빼곡히 기록했지만 등장인물의 이름과 나이, 인물 간 관계 외에는 어떤 구상도 적지 않았다는 작가는 가히 천재적이다. 머릿속에 이미 내용이 모두 들어 있었던 것이다. 책 한 권을 쓰더라도 뼈대를 그리고 줄거리를 미리 적는 다른 작가들과 달리 열 권 분량의 이야기를 머릿속에 담는 독특한 작업방식을 지녔다. 그 이유는 취재를 하면서 이미 머릿속으로 구상을 시작하고, 글을 쓸 때쯤에는 모든 것이 갖춰진 후 쏟아내기 때문이다. 실제 인물의 이름은 잘 외우지 못하고 여러 번 만나도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때도 있지만 자신의 수많은 소설 속 인물들은 모두 기억하는 작가의 선택적 기억력이 존경스럽다.
시인과 결혼하여 서로 존중하는 부부 사이로 지내는 것이 귀감이 된다. 수많은 세월 동안 시계처럼 일정하게 매일 글을 쓰는 노동을 했다는 것은 그의 성실함을 보여준다. 부친으로부터 ‘주색잡기를 멀리 하라’는 말을 듣고 평생 스스로 만든 글감옥에서 행복하게 글을 써 온 그의 삶을 놓고 누군가는 재미없어 어떻게 살았나, 할 수도 있겠지만 그는 누구보다 재미있는 생을 살았노라고 자부한다.
책을 읽으며 태백산맥을 헌책이나마 전집으로 구입해 두었다. 며느리와 아들을 필사 시킨 열권의 책을 한 권씩 읽어보려고 한다. 오른손 마비, 탈장, 종기 등의 직업병에도 소설 쓰기를 최우선으로 여겼던 작가의 숨결이 느껴질 것 같다. 작가가 쓴 박태준에 관한 책도 읽어보고 싶다.
--- 본문 내용 ---
- 헤밍웨이가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고, 사르트르가 레지스탕스에 가담하고, 에밀 졸라가 드레퓌스 사건을 짊어지고 정부 권력에 도전했던 것은 작품과 함께 행동으로 진실을 지키고자 했던 본보였습니다. (35쪽)
- 글쓰기의 유일한 방법: ‘삼다’ (다독, 다작, 다상량)를 다독, 다상량, 다작으로 고치십시오. 그다음으로는 노력의 시간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것입니다. 다독 4, 다상량 4, 다작 2의 비율이면 아주 좋습니다. 이미 좋다고 정평이 나 있는 작품을 많이 읽으십시오. 그 다음에 읽은 시간만큼 그 작품에 대해서 이모저모 되작되작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마지막 단계로 글쓰기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문학도는 그 순서를 거꾸로 하거나, 한 가지를 경시 해서 일을 그르칩니다. 어서어서 작가가 되고 싶은 다급한 마음에 많이 쓰고, 적당히 읽고, 별로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마음 급함이 글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소설가가 되는 것도 오히려 더디게 방해합니다. (47쪽)
- 60여 장쯤 써 놓고 6개월을 보내고 있다 1년이 넘어도 완성할 수 없을 것 같아 어느 토요일 오후에 마음을 다잡고 앉았습니다. 생각을 총정리하고, 저녁을 먹고 나서 곧 글쓰기를 시작했습니다. 글을 다 쓰고 나서 고개를 드니 창이 훤했습니다. ... 저는 그 후유증으로 사흘 동안 인사불성으로 앓았습니다. 그 작품이 중편 <청산댁>이었습니다. 그건 제가 생애 최초로 하룻밤에 가장 많이 쓴 분량이었고, 마지막 일이 되었습니다. 하룻밤에 그렇게 많이 쓸 수 있었던 것은 지난 6개월 동안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소설이 머릿속에 다 정리되어 있었기 때문이지요. 시인이 오랜 시간 시상을 곱씹고 또 곱씹고, 다듬고 또 가다듬고 하다가 어느 한순간에 종이 위해 토해놓듯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154쪽)
- 각종 직업병: 극심한 기침병, 위궤양, 엉덩이 종기, 극심한 몸살, 오른팔 마비, 탈장 (336~340쪽)
- 박태준은 자원도 없고, 자본도 없고, 기술도 없던 3무의 상태에서 두 개의 거대한 제철회사, 세계 2위의 철강국가의 신화를 이룩해낸 인물입니다. 그 고난의 역경을 헤쳐나가는 감동의 위대한 걸음걸음을 여기 다 적지 못해 아쉽고 안타깝습니다. (큰작가 조정래의 인물이야기 5. 박태준 – 꼭 읽고 싶은 책) 짧은 인생을 영원한 조국에. 이건 박태준의 건설 현장 숙소에도, 집무실에도, 집에도 붙어 있는 평생의 좌우명입니다. 그분은 그 길을 한 번도 어긋나지 않게 걸었고, 광양제철을 완공한 다음 명예회장으로 현직에서 물러나 앉으면서 요즘 유행하는 스톡옵션은커녕 퇴직금도 받지 않고 맨손이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집 한 채 있던 것을 팔아 ‘아름다운 재단’에 10억원을 기부하고도 세상이 모르게 했습니다. ... 그 자랑스러운 주역과 함께 우리가 동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의 긍지요 자존심입니다. (374-375쪽)
- 많은 분들은 제가 이렇게 살아온 것을 믿기 어려워하고, 이해하기 어려워합니다. 무슨 재미로 사느냐고 하기도 합니다. 저는 또 그냥 웃습니다. “제가 가장 불행할 때가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이 사람 저 사람에 얽혀 하루를 없애고 집으로 돌아올 때고, 가장 행복할 때가 글을 쓰고 있을 때입니다.” (402-403쪽)
- 저는 대학교 때 화투도, 당구도, 바둑도, 술도 다 접해보았습니다. 그러나 화투, 당구, 바둑은 똑같은 이유로 바로 손을 뗐습니다. 방금 전까지 문학이 어떻고, 인생이 어떻고, 우정이 어떻고 했던 친구들이 그 잡기가 시작되면 돈을 따려고, 서로 이기려고 눈에 불을 켜며 전혀 딴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다투면서 보내는 시간이 너무 아까웠습니다. 그런 깨달음 뒤에서 아버지의 ‘주색잡기 하지 마라’는 엄한 음성이 메아리 쳐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저는 대학 시절에 마음을 정리한 이후 평생토록 그 세 가지에 손을 댄 적이 없습니다. 그나마 오래 지속된 것이 술입니다. 술은 대인관계를 엮어주고, 긴장을 완화하는 효과를 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과음을 해서 실수한 일은 서너 번에 지나지 않고, 긴 소설 쓰느라고 20년을 술을 안 마시다 보니 지금은 자연스럽게 술을 끊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노름바둑에 문학 인생을 망쳐버린 문인이 여러 명 있습니다. 저는 그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저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예, 인생이야말로 스스로 경작하고 스스로 운영하는 것이니까요. 그 자유는 무한한 동시에 무한한 책임도 요구합니다. (408쪽)
- (어린 시절 친구와 직접 만든 저금통을 열었을 때 큰 돈을 보고 놀란 후,) ‘돈은 안 쓰면 모아진다!’ 돈을 간추리며 한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지워지지 않고 언제나 제 마음의 중심에 살아있었습니다. 그로부터 45년쯤 지난 10여 년 전에 미국의 세계적인 갑부가 우리나라에 와서, 부자가 되는 비결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했습니다. “절대불변의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돈을 안 쓰면 됩니다.” 저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웃었습니다. 그건 제가 초등학교 때 느꼈던 것이고, 저는 평생 그렇게 해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410-411쪽)
- 글쓰기 계획을 세우는 것은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먼 나라 여행 계획을 세우는 것처럼 가슴 두근거리는 일입니다. 먼 나라 여행이 미지의 세계에 대한 설레임이듯이 새로 쓸 작품에 대한 설레임도 언제나 새롭습니다. 온갖 고난을 무릅쓰면서도 굳세게 새로운 도전에 나서는 것이 탐험가의 생명력이듯이 새로운 작품을 향하여 새로운 설레임으로 펜을 드는 것, 그것이 작가의 생명력일 것입니다. “작가는 여든의 나이에도 소년의 마음을 지녀야 한다.” 괴테의 말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저는 앞으로 쓸 작품들의 자료를 차근차근 모아나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이 끝나면 바로 다음 장편소설의 취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됩니다. (421쪽)
* 목소리 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