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때 읽었던 부활은,
분명 지고지순한 러브스토리였고 대문호의 고전명작들은 어렵고 복잡할거라는 선입견을 깬 의외로 대중소설같은 통속적인 이야기들이 펼쳐진다는 걸 알고 신기해했던 책이었습니다.
빠져들어가며 읽으면서 나도 이런 사랑을 해봤으면 좋겠다고 네흘류도프에 감정이입도 했었고요. 비슷한 시기에 어머니가 읽고 숨겨 두시던 시드니 셀던의 소설들을 몰래 빼서 읽곤 했었는데 셀던의 소설들이 선정적이고 자극적이긴 했지만 주인공의 소시적 추억과 치정을 소재로 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었고, 같은 소재지만 1980년대 한국에서 살았던 청소년에게는 동시대의 미국보다 80년 전 러시아의 정서들이 오히려 친숙하게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10대에 읽었던 책 가운데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었던 제 '그 시절의 책'이었어요.
아재들은 기억하시겠지만 7~80년대 '카츄샤'로 부터 유래되는 "비운의 여인" 캐릭터가 우리 대중문화 저변에 흔한 요소로 존재했었습니다. 어릴적 부잣집 도련님에게 몸과 마음을 망치고 화류계로 내몰려졌다가 세월이 흐른 후 재회하는 시골소녀의 스토리는 사골국물처럼 소설, 영화에서 많이 우려졌었지요.
그런데 이제 다시 읽어보니 부활은 전혀 연애소설이 아니고 계몽소설이었습니다. 네흘류도프와 카츄사의 러브스토리는 톨스토이 영감이 단지 자신의 철학과 사상을 강조하기 위해 끼워놓은 악세사리에 불과했으며 더우기 신분 상으로 극명하게 대비되는 귀족 청년과 매춘부로 메인캐릭터로 설정함으로서 훨씬 더 당위성이 높아지고 극적인 강조가 가능해졌던 것 같습니다.
내용과 주제는 충분히 재미있고 공감되며 소설의 격과 위상은 충분히 찬양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지만 한편 웬지 학창시절의 추억 하나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좀 아쉬운 감정도 느껴집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초 제정러시아의 역사와 정교문화, 그리고 톨스토이 영감의 인생, 특히 이 소설을 집필한 일흔 언저리에 어떠한 상태였는지를 약간이라도 알고 읽는다면 더욱 흥미진진한 소설입니다. 이 책은 그 당시 러시아의 대표적인 반동 불온서적이었으며, 안나 카레니나나 다른 톨스토의 단편들과도 소설의 풍에서 정말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한 십년정도 지나고 한번 더 읽어볼 생각입니다. 또 다른 감회가 생겨나겠지요.
그 전에 부활 이 소설도 근사한 하드커버 합본으로 한 권 정도는 나와줬으면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