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친하게 지냈던 원어민 선생님이 권하셨던 책입니다. 그 때는 원서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얼마 전 학교 도서관에 이 책이 꽂힌 걸 보고 읽고 싶어 빌려왔습니다. 다시 읽는 번역본은 그 때와는 좀 다른 느낌이긴 하지만 여전히 충격적이고도 재미있었습니다.
'소방수'를 뜻하는 Fireman이 여기서는 책을 태우는 '방화수'로 나옵니다. 이 책이 쓰였던 53년. 한국 전쟁이 마무리된 직후인 그 때 이미 이 책에는 벽걸이 쌍방향 TV나 휴대용 TV, 이어폰과 같은 첨단 기기들에 대한 내용이 등장합니다. 작가의 상상력 덕분에 이 책은 조지 오웰의 1984와 비견되기도 합니다. 1984가 정치적 성향이 강한 책이라면 이 책은 보다 사회 전반에 걸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10년째 방화수 일을 하고 있는 몬태그는 아내와 함께 아파트에서 살고 있습니다. 거실 3면에 TV가 걸려 있고, 아내 밀드레드는 TV를 친구 삼아 지냅니다. 그녀에게 다른 건 관심 밖입니다. 남편에 대해서도 무관심합니다. 어느 날 퇴근 후 수면제를 다량 먹은 부인을 발견하고 응급처치 요원을 불러 치료를 하는데 이들은 아내와 같은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고, 점점 늘어난다고 이야기합니다.
몬태그는 어느 날 클라리세 매클런이라는 한 소녀를 만나고 사회 전반에 의문을 갖게 됩니다. 그녀는 보통 사람들과 다른 면이 있습니다. 눈을 보고 이야기하는 그녀는 가족과 다복한 시간을 보냅니다. 남들이 다 가는 학교를 한심한 곳으로 생각해 가지 않습니다. 학교는 더 이상 학문을 배우는 곳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몬태그는 언젠가부터 보이지 않는 소녀가 걱정됩니다. 살면서 세계관이 흔들리는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몬태그에게 그 소녀와의 만남이 그랬습니다.
그에게 또 하나의 사건이 발생합니다. 책을 태우러 간 집에 앉아 있던 말없는 부인의 죽음을 접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직업에 회의를 느낍니다. 책을 가까이 해서는 안 될 그는 품에 숨기고 집에 가져옵니다. 그를 보는 아내 밀드레드는 한없이 불안하기만 합니다. 책을 읽는 것이 불법이기 때문입니다.
책에 대해 갈증을 느끼던 그에게 또 한 사람이 나타납니다. 그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해 주는 파버 씨입니다. 그는 오래 전 교수 생활을 했었고, 이 사회에서 책과 신문과 도서관과 인쇄업자들이 사라져가는 것을 지켜본 사람입니다. 파버 씨를 만난 이후 책을 더 사랑하게 된 방화수 몬태그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 불안하고도 궁금한 마음으로 책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이 책이 나에게 강렬했던 이유는 나 또한 책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책이 없는 세상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이 책은 정부에서 책을 불태우기 전, 이미 사람들 속에 만연한 책 경시 풍조를 이야기합니다. TV가 등장하고, 사람들에게는 수많은 볼거리와 놀 거리가 생겼습니다. 더 이상 사람들은 심사숙고하거나 철학을 비롯한 학문이나 문학을 논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점점 인스턴트 적이 되어 가는 인간 사이의 감정은 서머리 한 지식만큼이나 무미건조합니다. 책으로부터 멀어져가는 사람들 다음 순서로 방화수가 등장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이 책은 얼마 전에 읽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마찬가지로 디스토피아를 보여줍니다. 과학 기술이 극도로 발달된 멋진 신세계의 그것과는 좀 다른 모습이긴 하지만 인간성을 상실한다는 면에서 그 맥락을 같이 합니다. 다행히 TV뿐 아니라 수많은 디지털 기기가 등장해 우리를 현혹하는 오늘날에도 책과 신문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느림의 미학을 경탄하거나 고전과 철학을 탐독하는 이들이 줄어든 건 사실이겠지만 그래도 아직 이 땅에는 책과 학문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책을 경시하는 세상은 인간성을 상실하고 인스턴트적인 요소들만 남아 삶의 이유도 존재 의미도 망각한 채 하루하루를 동물과 다르지 않게 살아갈 수도 있다는 이 책의 경고를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저자는 후기에서 많은 이들이 이 이야기의 결말을 달리 해서 다시 쓰거나 후속편을 써 달라는 요구들을 많이 들었다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그는 젊은 날 자신의 저작을 고치지 않고 보존했습니다. 갑자기 사라진 소녀는 어떻게 되었을지, 그리고 남겨진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갈지, 핵폭발 이후 세상이 어떻게 달라질 것인지 궁금한 마음은 많지만 그 모든 물음을 독자의 몫으로 남긴 저자의 결정을 존중합니다. 소장할 만한 책이어서 원서와 함께 구입했습니다. 또 다시 시간이 흐른 후 이 책을 다시 읽는다면 어떤 느낌일지 벌써부터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