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도스토옙스키의 마지막 작품인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었다. 20여년 전 대학교에 다닐 때 3권으로 된 책을 읽으려고 시도했다가 1권을 힘들게 읽은 후 2권 이후로 읽는 것을 포기한 기억이 있다. 그 후로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에 대해 두려움이 생겼던 것 같다. 여기 저기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에 대한 글도 많이 보고 이야기도 많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움에 쉽게 책을 펼치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에 서평 이벤트에 당첨되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다시 책을 펼치게 되었다. 5명을 뽑는 이벤트에 60명이 넘게 신청했기에 기대를 전혀 하지 않았는데 덜컥 뽑히게 되어 1800페이지에 육박하는 책을 받아보게 되었다. 사실 작년에 에두아르드 투르나이젠의 도스토옙스키 신학 해설서를 보고서 올해 초에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어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었다. 그러나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쉽게 시작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연말에 읽게 될줄은 몰랐다.
읽어 나가면서 20년 전의 두려움은 말끔히 사라졌다. 방대한 분량이 부담으로 다가오긴 했지만, 그렇게 어렵지 않고 술술 잘 읽혔다. 번역자의 차이일까? 다른 번역본은 모르겠지만, 이 번역본은 상당히 잘 읽혔다.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도스토옙스키는 만연체를 많이 사용한다는데, 이 책은 그렇게 긴 문장보다는 읽기 쉽게 번역하는데 중점을 둔듯하다. 개인적으로는 도스토옙스키의 만연체 느낌보다는 읽기 쉽게 번역하는 것이 더 좋은 듯하다.
표트르 카라마조프와 그의 3 아들, 드미트리, 이반, 그리고 알렉세이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이다. 표트르 카라마조프는 우리나라 말로 하면 나름 성공한 양아치 정도 되는 느낌이다. 그리고 그의 피를 물려받은 세 아들은 각각의 개성을 갖고 있다. 아버지와 가장 닮은 드미트리는 아버지와 한 여인을 두고 경쟁함으로써 이야기의 중심을 이끌어간다. 둘째 이반은 명석한 두뇌를 바탕으로 많은 공부를 하고 지식을 쌓는다. 그리고 화자가 주인공이라 밝힌 알렉세이는 다른 이에게 호감을 주고, 수도원에 들어가 훌륭한 장로 아래에서 수도사 수련을 받는 종교적 인물이다.
중심이 되는 스토리 라인은 아버지인 표트르와 드미트리가 한 여자 그루센카를 두고 경쟁하다가 표트르가 살해당하고 그에 대한 범인으로 드미트리가 지목받고 재판을 받는 이야기라 볼 수 있다. 약간은 추리소설 같은 느낌이 들어서 더 재미있게 읽었다. 마지막에는 그 결말이 궁금해서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막 읽어갔던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 책의 인물들을 통해 도스토옙스키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이 책에는 카라마조프의 피가 흐른다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 왠지 아담의 타락을 이어받은 인간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표트르는 아담을 상징하고 드미트리, 이반, 알렉세이는 그 후손인 우리를 상징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열정적이고 직설적이며 피의 저주와 명예 사이에서 고뇌하는 드미트리 속에서 원죄를 극복하려 노력하는 우리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높은 지성을 쌓은 이반의 모습에서 이성을 중요시하다보니 이성을 넘어서는 하나님을 쉽게 인정하지 못하는 우리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조지마 장로에게 교육을 받고 세상에 나와서 그 배움을 실천하는 알렉세이의 모습에서 우리가 바라는 교회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또한 교회가 잘못되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유명한 대심문관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허락하신 자유를 빼앗아버린 교회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지적한다. 많은 이유를 대지만, 그 어떤 이유로도 주님의 뜻을 거슬러서는 안된다. 교회는 특히나.. 그런데 주님의 이름을 내세워서 주님의 뜻을 거스르는 교회의 모습이 그냥 꾸며낸 이야기라 넘어갈 수 있을까? 우리 교회의 모습은 아닌가? 자신의 욕심을 위해, 주님의 이름을 내새우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것 마저도 제대로 포장하지 못하고 사회에서 뻔히 보이고 느낄수 있게... 단지 믿는 사람만 주님의 이름에 가리워져서 깨닫지 못하고 있는게 아닌가? 그러나 그러한 교회에도 그리스도는 입맞춤을 통해 축복을 내리신다.
이반의 망상에서 나오는 악마의 이야기는 나 자신 속에 있는 악의 모습을 구체화 시킨다. 이런 저런 핑계와 합리화를 통해 주님께 나아가는 것을 막고 나의 이익과 욕심을 채우는 모습을 그린 것이 아닐까? 나 자신만이 바라볼 수 있는 악을 직시하는 이반의 모습이 우리에게 필요한 모습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결국 드미트리에게 내려지는 판결은 우리 인간 사회의 한계를 꼬집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진실도 그렇고 검사와 변호인과의 변론도 그렇고 방청객의 분위기도 그렇고... 그러나 그 판결은 그것이 정의이고 진실이 되어버린다. 그것이 인간 사회의 한계이고 모순이다. 도스토옙스키는 그 한계를 꼬집는다.
알렉세이가 자신에게 돌을 던지던 일류샤를 아무런 조건 없이 돌아보았던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조건없이 부어진다. 그리고 그 은혜 속에서 일류샤를 괴롭히던 친구들은 돌아온다. 일류샤의 곁으로 돌아와 위로하고 마지막까지 함께한다. 그것이 타락한 인간 사회 속에서도 묵묵히 주님의 뜻을 실천하고자 노력하고 살아내는 이들의 모습이다. 부족함을 극복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과거의 잘못을 돌이키는 이들의 모습니다. 그렇게 성장하는 이들 속에서 희망을 본다.
고전, 명작이라 분류되는 작품들은 분명 그 이유가 있다는 생각을 고전이나 명작을 읽을 때마다 한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도 역시 그런 생각을 한다. 1800 페이지에 육박하는 내용을 넘어 그보다 훨씬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우리의 내면의 연약함과 악함..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는 종교의 모습까지도 도스토옙스키는 보여준다. 그래서 나 자신을 바라보게 만든다. 우리가 돌을 던진 주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부족함을 극복하게 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희망을 찾고 일어날 수 있다.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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