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추석 연휴는 잘 보내셨는지요?
저는 한국의 첫 블록체인 컴퍼니 빌더인 체인파트너스를 운영하고 있는 표철민이라고 합니다. 컴퍼니 빌더란 ‘회사를 만드는 회사’를 말합니다. 설립 취지에 따라 창업 1년만에 110명의 직원을 직접 고용하고 10개가 넘는 블록체인 스타트업을 키워가고 있습니다.
저는 작년에 취해진 우리 정부의 ICO 전면 금지와 가상화폐 거래소에 대한 신규 가상계좌 제공 중단 등 일련의 조치에 대하여 블록체인 분야 종사자 중 가장 중립적인 시선으로 ‘투기 과열 해소를 위해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는 의견을 낸 바 있습니다.
그러나 작년 말 하루 12조원에 달하던 국내 가상화폐 거래액이 현재 하루 1조원 내외로 크게 줄어, 투기 과열이라 할 만한 근거를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론 정부 정책이 아주 효과적으로 작용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좀 더 차분하게 이 가상화폐라는 아이가 무엇인지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쉽게 설명하면 블록체인 기술을 이용해 모두가 신뢰할만큼 복제가 어려운 딱지를 만든 것입니다. 복제가 불가능한 이 딱지를 100만개 만들어 시장에 유통시키면 딱지를 더 많이 갖고 싶은 사람과 이걸 팔고 싶은 사람이 거래를 하기 시작합니다.
이 딱지에 이름을 붙인 것이 ‘Cryptocurrency’, 이른바 ‘가상화폐 또는 암호화폐’입니다. 이름을 이렇게 붙인 것이 문제였습니다. 초기 투자자들이 ‘이것이 법정화폐를 대체할 것’이라는 주장을 했습니다.
그런 주장에 처음에는 대부분 관심이 없었지만 가격이 급등하자 그런 주장을 믿는 사람이 점차 많아졌습니다. 그러자 많은 화폐학자들이 ‘그것이 화폐가 될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조목조목 지적을 했습니다.
오늘날 비트코인 장외거래 시장에서는 한 번도 사용된 적 없는 갓 채굴된 비트코인은 시장에 유통되는 비트코인보다 5% 가량 높은 가격에 거래 됩니다. 비트코인은 과거 어느 거래에 사용되었는지 누구나 열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느 거래소 해킹 사건 때 털린 비트코인이거나 마약 거래에 이용된 비트코인은 사람들이 보유하기 꺼림칙해합니다.
이는 화폐의 기본 성격 중 하나인 가치 동등성(과거 어떤 거래에 이용되었던 화폐이든 액면에 표기된 가치는 모든 화폐가 동일하게 반영해야 한다)에 위배됩니다. 이뿐 아니라 가치를 담는 그릇으로서 그 가치의 크기가 과도하게 출렁이는 문제 등 가상화폐는 법정화폐가 추구하는 화폐의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따라서 가상화폐가 스스로 감히 ‘화폐’라 주장하는 순간, 그리고 가상화폐 투자자들이 이것이 언젠가 우리가 쓰는 법정화폐를 대체할 것이라 믿는 순간, 작년 JTBC의 가상화폐 토론에서의 유시민씨와 같이 전통 경제학을 공부한 분들로부터 처절하게 난타당할 것은 뻔한 미래입니다.
실은 우리가 가상화폐라고 부르는 것은 다이아몬드 목걸이나 명품처럼 자산의 성격이 훨씬 강합니다. 반짝반짝 빛나는 돌인 다이아몬드 가격은 땅 속에서 정해져 나온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현재 지불할 의향이 있는 금액이 곧 다이아몬드의 가격이 됩니다. 루이비통의 백이나 애플 아이폰, 강남의 아파트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상품과 자산은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의 합의에 따라 가격이 정해집니다.
비트코인은 작년 초에는 950불이었다가 작년 말에는 13,600불이었습니다. 현재는 6,600불을 지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명백히 (화폐가 아닌) 자산입니다. 요즘은 법정화폐와 1:1로 연동된 가상화폐도 속속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비트코인보다는 상대적으로 화폐의 성격이 훨씬 더 커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법정화폐 없이는 연동된 가상화폐 의미가 없어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선 용어부터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가상’이라는 말은 허구성이 느껴지기 때문에 국제적으로 점차 퍼지고 있는 ‘디지털 자산(Digital Asset)’이라는 용어를 제안합니다. 세계 최초의 비트코인 취급 라이센스인 ‘BitLicense’를 뉴욕주로부터 받아 합법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북미 최대 거래소인 Coinbase도 최근 오픈한 서비스들에서 Currency라는 용어 대신 ‘Digital Asset’이라 표기하고 있습니다.
디지털 자산이라는 표현은 가상화폐를 일컫는 조금 더 광의의 표현입니다. 디지털 자산의 성격에는 크게 네 가지가 있습니다. 제 나름의 분류로 다음과 같습니다.
1. 순수 디지털 자산: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정확히는 이더리움에서 사용하는 화폐인 ‘Ether’), 리플(엄밀히 따지면 리플의 화폐인 ‘XRP’)처럼 현실세계의 화폐 또는 자산과 전혀 연동되어 있지 않은 디지털 자산을 말합니다.
이것들의 가치는 수요과 공급에 따라 무척 출렁이기 때문에 이것이 화폐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분들로 하여금 디지털 자산 전체의 가치를 폄하할 중요한 논리적 근거가 됩니다.
2. 법정 화폐 연동 디지털 자산: 미국달러(USD)와 가치가 1:1로 연동되도록 설계되어 있는 USDT(USD Tether)나 TUSD(True USD)류의 디지털 자산을 말합니다. 이른바 ‘Stable Coin’이라고도 부릅니다.
한국에서는 티몬의 신현성 창업자가 IMF가 발행하는 국제 통화 바스켓인 SDR과 1:1로 연동되는 Stable Coin을 만들겠다고 공언한 상태입니다. 많은 회사들이 원화(KRW)와 1:1로 연동되는 Stable Coin을 만들고자 구상해 왔지만 여러 규제로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3. 전통 자산 담보 디지털 자산: 부동산이나 그림, 자동차, 금, 다이아몬드, 원유, 주식, 채권 등 우리가 돈 주고 소유할 수 있는 모든 전통 자산을 담보로 하는 디지털 자산을 말합니다.
100억짜리 그림이 있다고 치면 기존에는 100억이 있는 사람만 이 그림을 살 수 있었습니다. (물론 빚을 내서 살 수는 있지만 최소한 이자를 감당할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그림을 담보로 100억개의 토큰(‘코인’이 일반인에게는 더 익숙하지만 코인이라는 용어는 ‘가상화폐’와 비슷하게 일정 가치로 현금화가 가능하다는 연상을 불러일으키는 이름이라 최근 해외에서는 조금 더 중립적으로 ‘토큰’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이 글에서도 ‘코인’은 모두 토큰으로 표기합니다.)을 만들면 단돈 100원만 있어도 100/100억 만큼의 권리를 소유할 수 있습니다.
이는 자산 투자의 혁명입니다. 부자들만 접근 가능했던 미술품이나 땅, 고가의 부동산에도 작게나마 일반인이 투자할 기회가 열리기 때문입니다. 기존에 그림을 팔려면 갤러리에 맡기고 중간에서 갤러리가 30%씩 수수료를 떼는 것도 예삿일이었습니다.
토큰으로 만들어 사고 팔면 권리의 직거래가 가능해집니다. 내가 가진 권리만큼만 거래가 가능하므로 모든 그림 소유자의 동의를 얻을 필요도 없습니다.
전통 자산의 거래 비용이 획기적으로 줄어들 기회가 있습니다. 이는 화랑과 부동산 등 중개자를 제외하고는 구매자와 판매자 모두에게 큰 혜택입니다. 일부 부동산이 REITs 상품으로 개발돼 상장된 경우는 있지만 여전히 이 세상 대부분의 부동산은 아무나 살 수 없습니다.
세상 대부분의 전통 자산은 유동화가 까다롭습니다. 돈이 필요한 주인은 권리를 손쉽게 쪼개 팔기 어렵습니다. 그림 하나를 통째로 내다 팔아야 합니다. 전통 자산 담보 디지털 자산은 자산 유동화를 비약적으로 쉽게 만들 수 있습니다.
기존에 주식이나 가상화폐 투자 정도만 할 수 있었던 서민들도 이런 시대가 오면 클림트의 명작 <키스>를 담보로 만들어진 토큰에 투자하거나 이중섭의 <황소> 그림 일부를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습니다. 위례 이후 10년만에 조성된다는 신도시 땅 역시 서민들이 나누어 소유할 기회도 생길 수 있습니다.
전통 자산의 권리 관계와 토큰의 권리 관계를 이어줄 회사는 필요할 것입니다. 기존 신탁사와 보험사가 이런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시대는 당연히 올 것이고 이끌어 세상이 변화하는 기회를 잡느냐, 뒤쳐지느냐는 온전히 우리 손에 달렸습니다.
4. 프로젝트 파이낸싱형 디지털 자산: 특정 프로젝트나 사업에 투자하고 해당 사업 성과에 따른 배당 권리가 부여된 디지털 자산을 말합니다. 이는 주식회사가 발행하는 주식의 기능과 유사하지만 훨씬 더 유연합니다.
한 회사가 신사업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여러 사업마다 개별적으로 투자를 받아 해당 사업의 배당권이 부여된 토큰을 유통시킬 수 있습니다. 일주일짜리 전시나 공연 같은 단발성 사업 역시 토큰화할 수 있습니다. 주식은 호흡이 길어 이런 형태의 프로젝트성 투자에 이용하기에는 불편합니다.
주식은 우선 유가증권 시장 상장 이전의 거래비용이 높습니다. 거래 상대방을 찾기도 힘듭니다. 배당도 1년에 한 번, 많아야 6개월에 한 번 이루어집니다. 토큰화된 자산은 배당을 매일 할 수도 있고 언제든 거래 가능합니다. 거래 상대를 찾기도 상대적으로 쉬우며 거래 비용도 비상장주식 거래에 비해 대단히 낮습니다.
주식회사 경영진의 불투명한 경영을 보완할 수도 있습니다. 계획된 청산일이 되면 경영진의 뜻과 무관하게 잔여 자산을 모두 토큰에 배분한 후 자동으로 프로젝트가 청산되도록 설계할 수도 있습니다. 경영진이 지출하는 비용 내역을 모든 투자자가 직접 확인할 수 있게 설계도 가능합니다.
프로젝트의 운영 방향이나 배당 성향을 투자자들이 직접 투표로 정할 수도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기업들처럼 주주총회, 감사, 사외이사 등 각종 견제장치가 선진국의 그것만큼 엄정하게 동작하지 않는 환경에서는 기업 운영의 투명성을 높이는 큰 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같은 디지털 자산의 등장과 활성화는 기존 자본 시장, 또는 기업 환경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많은 정부가 아직 이 정도로 중요성을 인식 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작년의 투기 열풍으로 인해 협의의 디지털 자산, 즉 비트코인을 필두로 한 ‘순수 디지털 자산’에 대한 투기 수요 억제와 장기적 제도화 정도는 필요하다 정도의 인식이 있는 상황입니다.
나머지 글은 여기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https://charlespyo.com/2018/09/26/디지털-자산發-혁신성장을-위한-대정부-제언-1/
코인을 네가지로 구분한게 인상적이네요.